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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 칼럼] 광주까지 갈 '택시운전사' 계신가요?
입력 2017-08-23 09:38    수정 2017-08-23 09:40

(출처=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컷)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서울에서 광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 직장 발령 때문이었다. 이사하던 날 아버지는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타고 광주로 먼저 떠났고, 나와 동생은 어머니 손을 잡고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탔다. 4-5시간쯤 걸렸던가. 지루함 끝에 도착한 광주역 풍경은 잊히지 않는다. 서울 말고 아는 도시라고는 인천뿐이었던 여덟 살 소년에게 광주는 낯섦 그 자체였다. 1982년의 일이다.

집이 광주역에서 멀지 않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어린아이 걸음으로도 20여 분이면 오갔다. 전학 간 학교도 가까웠다. 하굣길에 집으로 향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조금 더 걸으면 또 다른 학교가 나왔다. 우리 학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컸던 그 학교에서 연못을 발견하고는 친구와 무척 좋아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허접한 낚싯대를 던져놓고는 물고기를 잡으려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물론 결과는 항상 빈손이었다.

겨울이 가고 광주에서 첫 봄을 맞았다. 4월이었는지. 5월이었는지. 매캐한 냄새가 집으로 들어왔다. 곧 눈이 따끔거리고 목구멍도 아팠다. 콧물도 흘렀다. 그때 깨달았다. 비를 피하려면 처마 밑이면 충분하지만 냄새는 도무지 피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퇴근한 아버지가 낮에 있었던 얘기를 듣고는 말씀해주셨다. 네가 친구와 낚시를 하던 학교에서 흘러온 냄새일 거라고. 그곳이 전남대학교였다. 봄학기와 함께 시작한 학생들의 시위를 막는 경찰이 쏜 최루탄 냄새가 집까지 흘러온 것이다.

광주에 사는 동안 최루탄 냄새는 봄이 왔다는 메시지였다. 시간이 지나 조금씩 깨달았다. 매운 냄새 속에 광주가 간직한 ‘어떤’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고 광주항쟁을 이야기했다. ‘민주화운동’이라는 말이 붙기도 한참 전의 일이다.

광주는 대놓고 대화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믿을 만한 사람과 눈치 보며 짧은 말만 나눌 수 있었다. 어느 해인가 서울에서 놀러 온 외삼촌은 부모님에게 1980년 광주를 물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조차 그해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속 시원하게 답할 사람도 없던 때다. 마침 광주로 이사 간 누이동생을 보러 온 외삼촌은 궁금한 마음을 풀고 싶었겠지만.

1980년 5월 어느 날 택시운전사 만섭은 운이 좋았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가는 손님을 만났기 때문. 외국인이었지만 중동 건설 현장에서 배운 짧은 영어로 ‘나이쓰 츄 미츄! 아이 베스트 드라이버!’면 그만이었다. 통금 전에 광주까지 갔다 오면 그간 밀렸던 월세를 해결할 생각에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집에서 자신을 기다릴 어린 딸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내 운전대를 잡았다.

쭉 뻗은 고속도로마냥 만섭은 자신의 하루도 그렇게 시원하게 마무리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광주로 접근할수록 상황이 심상치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길목마다 군인들이 가로막은 채 서울로 되돌아가라 명령하듯 말했다. 겨우 광주에 들어갔지만 도무지 믿기 어려운 현실만 목격했다. 죄 없는 시민들이 군인이 쏜 총에 맞아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택시에 태워 온 승객도 오는 내내 의심스럽더니 광주에 오자마자 가방에서 커다란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광주의 참상을 취재하기 위해 몰래 들어온 독일 기자였다는 사실을 만섭은 그제야 깨닫는다.

권력을 잡은 자들은 80년대 내내 광주를 금기어로 묶어두려 했다. 희생자의 가족과 피해자들은 광주 밖으로 진실을 내보내기 위해 애썼다. 권력자들은 광주라는 분노의 바다 위에 폭도, 좌익, 빨갱이, 북한이란 그물을 던져 뒤덮었다. 무겁고 촘촘했을 그물의 날실과 씨실은 시민들의 노력으로 하나씩 끊어졌다. 숨죽여 그해 5월의 며칠을 찍은 영상과 사진, 용기를 낸 증언은 권력이 막고 선 광주의 경계를 타고 넘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위험을 무릎 쓰고 먼 나라의 현실을 취재하러 온 위르겐 힌츠페터도, 방관자에서 점차 기록자이자 메신저로 변모하는 만섭도 그물을 끊기 위한 싸움에 동참했다. 깊숙이 가라앉은 광주의 진실을 온전히 떠올리기 위해 다시 많은 이들이 고통 받으며 싸웠다.

광주를 옭아맸던 그물은 차츰 벗겨지기 시작했다. 광주사태라는 이름으로 깎아내렸던 그해 봄날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지정받았다. 한때 권력이 가로막아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던 희생자의 묘역은 지금 국립5.18민주묘지로 불린다. 힌츠페터가 목숨을 걸고 향했던 광주는 이제 서울에서 고속열차로 2시간이면 닿는다. 희생자가 잠든 묘역까지 가는 길도 쉽다. 광주시내 어디에서든 버스를 타면 갈 수 있다. 버스 번호가 ‘518번’. 2016년 세상을 뜬 힌츠페터의 유해 일부도 이곳에 안장했다.

버스 번호를 정하는 일부터 국가기념일 지정과 국립묘지 조성까지 모두 기억을 위한 행위다. 국가 권력의 폭력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에 대한 예의이자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장치다. 광주를 기억하기 위한 중요한 기록물도 있다.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민주화운동기록물’이다. 이 기록물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 한다.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은 민주주의와 인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광주의 참상과 시민들의 성숙한 공동체를 기록한 자료는 차고 넘침에도 당시 학살의 책임자는 회고록이란 이름으로 5.18을 모욕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조롱의 언어 앞에서는 차마 눈을 감는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민주화운동 37주기를 맞았다. 정부가 철저히 무시해왔던 추모 행사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대통령이 참석해 희생자의 딸을 안아주었다. 대통령도 울고 희생자의 딸도 울고 방송을 보는 국민도 울었다. 집에서 자신을 기다릴 어린 딸을 위해 서울로 향하던 '택시운전사' 만섭도 차 안에서 울었다. 광주에 두고 온 손님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곳에 두고 온 사람들을 잊을 수 없어서 운전대를 광주로 꺾는다.

영화 '택시운전사' 관람객이 천만을 넘었다. 천만 명이 그날의 희생을 기억할 거라 생각하니 최근 몇 년 광주를 왜곡하려는 행동에 대한 걱정을 잠시 접는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은 그해 봄날을,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