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주희의 AnB] 개츠비와 청춘을 다룬 두 시선, ‘버닝’& ‘소공녀’
입력 2018-06-04 15:09   

※ 아래 글에는 영화 ‘버닝’과 ‘소공녀’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진=영화 '버닝' '소공녀' 포스터)

영화 ‘버닝’(감독 이창동)의 마지막은 해미(전종서 분)가 없어지고, 종수(유아인 분)가 벤(스티븐연 분)을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만약 해미가 스스로 사라졌다면 그 이유는 세상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더 이상 해볼 것이 없을 때, ‘버닝’의 인물들은 죽음으로 이야기를 결말짓는다.

종수는 소설가가 되고 싶다. 하지만 동대문 물류창고에서 택배를 나르는 일로 먹고산다. 그마저도 포기하고 지금은 시골집에 내려와 송아지 밥을 주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이런 종수 앞에 벤이 등장한다. 놀고먹는 듯 보이지만 포르쉐를 끌고 다니는 벤. 그의 모습을 불편하게 느끼던 종수는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하자 어쩔 줄 몰라 한다. 결국 종수는 벤을 죽이고 만다.

그의 분노는 어디서 온 것일까. 종수와 해미의 고향에는 대남 방송이 들리는 곳이다. 현재 종수는 파주, 해미는 남산이 보이는 원룸, 벤은 강남 고급빌라에 산다. 종수는 벤을 보며 “한국엔 개츠비가 너무 많다”고 말한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개츠비는 젊은 나이에 남들이 범접하지 못할 부를 쌓고 날마다 파티를 여는 인물. ‘개츠비’ 벤이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말은, 종수에게 해미를 죽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혹은 해미가 아니라 종수 본인일 수도. 자신의 인생을 쓸모없는 인생으로 지레짐작한 종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맞닥뜨린다.

이창동 감독은 최근 진행된 인터뷰에서 영화에 나타난 분노의 원인에 대해 “계급이든 정치 문제든 세상이 잘못됐는데 정확히 문제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촛불로 눈앞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했다고 생각했는데, 청년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나아지진 않았다. 이건 또 다른 싸움이 필요한 건데 누구와 어떤 싸움을 해야 할지 모르는 거다. 세상이 미스터리 같다. 세상은 과거에 비해 세련되고 편리해졌다. 하지만 원래 있던 것들이 어딘가로 밀려간 거다. 새로운 것들이 예쁘게 놓여 있어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이야기 했다.

이어 “요즘 세대에는 희망이 없다. 이건 능력과 노력과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게 살게 되어 있다. 개인은 점점 왜소해지고 초라해진다. 멀쩡해 보이지만 다들 우울증에 걸려 있다. 알기 쉬운 서사로 쉽게 감동하는 소재를 가지고 작품을 했다면, (요즘 세대들에게) 조금은 위로가 되어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진 않았다. 오히려 질문을 하고 싶었다”라고 의도를 설명했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이처럼 ‘버닝’은 이미 좌절해버린 청춘의 모습을 다룬다. 주인공이 자기 위로를 하지만 생산적인 방향이 아니라 파멸로 나아간다. 때문에 ‘버닝’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면 세상은 무기력하고 덧없게 느껴진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에게 속수무책 당하고만 있어야할까.

이를 극복할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 영화 ‘소공녀’(감독 전고은)다. ‘버닝’과 ‘소공녀’ 모두 개인이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는 세상을 그렸으나, 전혀 다른 캐릭터와 분위기를 통해 정 반대의 결말을 도출해낸다. ‘버닝’은 극을 분노로 채웠고 ‘소공녀’는 위로를 담았다. ‘버닝’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그들이 분노하는 행위에 대해 다뤘다면, ‘소공녀’는 그럼에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소공녀’에서는 ‘소확행’을 언급한다. ‘소확행’이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신조어로, 작은 것만이라도 지키고자 하는 요즘 세대의 의지를 담은 말이다. 주인공 미소(이솜 분)는 자신만의 소확행을 위해 집을 포기한다. 집은 기존 세대들에게 ‘의식주’라는 말로 묶여질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하지만 미소는 담배와 위스키 값이 오르자 집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물론,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 ‘크고 확실한 행복’보다 더 좋은 개념은 아닐 것이다. 다만 ‘소공녀’에서는 희망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니 이 작은 것으로 인해 희망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버닝’과 ‘소공녀’를 통틀어 행복한 사람은 미소 혼자다. 미소는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정확하게 아는 유일한 인물이다.

(사진=CGV 아트하우스)

‘버닝’의 종수와 ‘소공녀’의 미소가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 역시 이들이 ‘어떤 시선으로 개츠비를 보느냐’에서 출발한다. ‘버닝’에서 개츠비가 벤이라면, ‘소공녀’에서 개츠비는 과거 밴드 멤버들로 활동했던 친구들이다. 밴드 멤버들은 다른 사람처럼 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없앴고, 결국 뭐가 중요한지 모르게 되었다. 멤버 중 누군가는 개츠비가 되었으나 더 많은 결핍을 얻는다.

그리고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안재홍 분)마저 개츠비가 되고자 할 때, 미소는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한솔은 만화가가 되고 싶고, 미소와 함께할 때 가장 행복하다. 하지만 그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해외 취업을 하기로 한다. 미소는 “사람답게 사는 게 뭔데?”라고 묻는다. 한솔은 “알잖아. 그렇고 그런 것들. 남들 다 하고 사는 거. 나도 해보고 싶어”라고 답한다. 미소가 아무리 “난 이대로 좋은데?”라고 말해도, 한솔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다. 한솔이 떠나는 날, 미소는 굳이 마다하는 한솔의 손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노트를 들려준다. “혹시 모르잖아. 네가 꿈을 포기하지 않을지도.”

‘소공녀’에서 어느 한 개츠비는 미소의 사랑을 염치없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미소가 아닌 커다란 집을 가진 그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버닝’에서 개츠비가 분노를 유발하는 존재라면, ‘소공녀’에서 개츠비는 오히려 연민의 대상이다.

이처럼 ‘버닝’과 ‘소공녀’는 우리 현실과 청춘이 가진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며 각각 허무함과 희망을 그려낸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버닝’은 질문하는 영화이고, ‘소공녀’는 대안을 제시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다만 관객은 다함께 문제를 찾아보자고 나서든지, 아니면 나만의 소확행을 찾든지, 청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