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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Z리뷰] ‘말모이’, 착한 마음 모아 묵묵하게
입력 2019-01-07 10:59   

(사진=더램프-롯데엔터테인먼트)

무력 독립 투쟁을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우리 말을 지킴으로써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인들의 독립 운동을 다룬 적은 없었다. 사전을 만드는 과정은 무력 투쟁처럼 극한 상황이나 스케일 큰 액션신이 등장하지 않기에 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어 영화화되기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예상대로 영화 ‘말모이’(감독 엄유나)는 극적이진 않다. 하지만 말과 마음을 보탠 인물들의 묵묵한 이야기가 관객을 움직인다.

1940년대,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은 주시경 선생이 남긴 원고를 기초로 사전 ‘말모이’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친일파인 정환의 아버지는 정환에게 독립이 될 것 같냐고 묻는다. 사전을 만든다는 건 바로 눈앞이 아니라 멀리 내다보는 것. 독립운동 역시 당장 내일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전 작업을 만드는 행위와 비슷하게 볼 수 있다. 이에 조선어학회의 행동은 독립운동의 관점에서 더욱 울림을 가져다준다.

우리말이 금지된 시대에서 사전 제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평생 글을 모르고 살던 까막눈 판수(유해진 분)가 우연히 심부름꾼으로 조선어학회에 취직한다. ‘벤또’든 ‘도시락’이든 배만 부르면 된다고 생각했던 판수였지만, 막내딸만큼은 가네야마가 아닌 김순희라는 이름을 지켜주고 싶다.

(사진=더램프-롯데엔터테인먼트)

사전을 만드는 중심인물은 류정환을 비롯한 조선어학회지만, ‘말모이’는 판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당시 대표 지식인이자 사전을 만들었던 주체인 조선어학회 사람들이 아닌 평범한 인물 판수의 눈으로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은, 전국 사투리를 모으는데 어려움을 겪던 정환에게 수십명의 판수 친구들이 찾아와 쉽게 일을 처리해주는 장면이 대답이 된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판수의 모습은 독립운동 또한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신일 것이다.

때문에 ‘말모이’에서는 유해진, 윤계상이 중심축이 되지만 빛나는 조연들이 대거 등장한다. 극장 선전 담당으로 극의 웃음 포인트를 담당하는 조현철은 그동안 출연한 영화 중 가장 큰 비중으로 극에 참여했다. 오랜만에 착한 얼굴을 맡은 김홍파는 조선어학회 어른이자 판수의 감옥소 동기 조갑윤 선생 역으로 조선어학회를 묵직하게 잡아준다. 술과 사람을 사랑하는 시인 역의 우현, 조선어학회 회원이자 ‘한글’ 잡지 기자 역의 김태훈, 책방 주인이자 강단 있는 조선어학회 회원 역의 김선영, 막내 회원 역의 민진웅, 그리고 판수의 아들ㆍ딸을 맡은 아역 배우 조현도와 박예나 등 모두 인상 깊다.

아픈 시대를 그렸기 때문에 눈물은 자연스럽게 따라오지만, “신파를 고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엄유나 감독의 뚝심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12세 관람가. 오는 9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