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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우의 올댓이즈] ‘부산행-서울역’, 연상호 新세계로 도킹
입력 2016-08-19 18:23   

▲감독 연상호(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연상호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건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였다. “제목은 이상한데, 작품은 끝내줘! 그런데 애니메이션이야!” 영화제 기간 내내, 해운대 바람에 실려 회자된 작품은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이었다. 직접 확인한 ‘돼지의 왕’은 소문 이상으로 놀라웠다. 매끈한 작품은 결코 아니었다. 인물들의 움직임은 둔탁하게 끓기기 일쑤였고, 작화도 살짝 미흡했다. 그러나 영화에는 그러한 단점을 압도하는 에너지가 가득했다. 우리사회의 폐부를 ‘억’ 소리 날 정도로 정확히 내리꽂는 박력도 상당했다. 놀라움 중 하나는 이 작품이 장편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초저예산에 해당하는 1억 2000만원에 만들어졌다는 점. 그러니까 ‘돼지의 왕’은 척박한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이 낳은 기형적인 괴물이었고, 그럼에도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증명한 ‘또 다른 의미에서의’ 괴물이었다.

2년 후 세상에 나온 애니메이션 ‘사이비’는 연상호가 세상을 향해 휘두른 두 번째 멋진 안타였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살핀 풍부한 은유는 전작의 성과를 이어가며 연상호라는 이름에 신뢰를 안겼다. ‘돼지의 왕’ ‘사이비’를 거치면서 나는 연상호의 세계에 완전히 매료됐는데, 그것은 아마도 ‘진짜 이야기꾼의 등장에 대한 흥분’ ‘실사영화를 압도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창작자에 대한 호기심’이었던 것 같다.

동시에 나는 두 가지 기분 좋은 상상 앞에서 선택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하나는, 연상호가 만든 실사영화를 보고 싶다.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애니메이션 외길을 걸어서 한국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됐으면 좋겠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그의 드믄 재능이 실사영화 안에서 어떻게 발현될지를 보고 싶은 쪽이었는데, 이는 연상호 세계에 빠진 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낀 점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 “‘사이비’를 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어요?”, “실사는 안 만들어요”라는 질문이 쇄도한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지난 7월, 여러 사람의 바람을 실은 ‘부산행’ 기차가 드디어 스크린에 당도했다. 고백하자면, 연상호 감독이 세상에 내놓은 첫 장편 실사 ‘부산행’을 처음 접했을 땐 조금 당황스러웠다.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던 연상호의 기존 인물들을 떠올렸을 때, ‘부산행’의 캐릭터들은 너무 단선적이고 서사 역시 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본격 상업영화라는 틀 안에서 작가적 야심을 누른 게 아닌가란 아쉬움을 느끼고 있을 때, 연상호 감독을 만나 그의 계획을 읽었고, 애니메이션 ‘서울역’을 만났다. 그리고 다시 그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잘 알려졌다시피, ‘부산행’ 이전에 애니메이션 ‘서울역’이 있었다. 좀비 애니메이션 ‘서울역’을 준비 중이던 연상호 감독은 이것을 실사로 리메이크해보자는 배급사 NEW의 제안에, 또 다른 묘수를 냈다. ‘서울역’ 다음날부터 이야기를 실사로 새롭게 만들자는 것. NEW는 연상호의 역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영화와 애니메이션 연작이라는 결과물이 탄생했다. 여기에는 연상호 감독의 또 하나의 의중이 숨어 있는데, 그것은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의 자생적 경쟁력 확보다.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은 굉장히 척박합니다. ‘서울역’을 그대로 두면, 배급에 어떤 한계가 있을지 충분히 예상이 됐죠. 그렇게 놔두고 싶지 않았어요. 실사영화와 패키지 형식으로 간다면 ‘서울역’에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겠다 싶어서 NEW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부산행’은 다양한 작업을 하고 싶은 연상호 개인의 창작욕구의 발현이기도 했지만,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창작자들이 존경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다”는 연상호의 실험이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 흥미로운 결과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부산행’의 흥행은 ‘서울역’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서울역’은 개봉 하루 만에 ‘돼지의 왕·사이비’ 최종관객 기록을 경신했다.

“저예산 영화나 저예산 애니메이션은 활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한국의 극장 시스템은 제가 봤을 때, 작은 영화들에는 희망이 없어요. 희망이 없다고 해서 앉아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뉴미디어 플랫폼을 많이 때문에 거기에서 할 수 있는 자기 자리를 빨리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연상호 감독은 독립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다다쇼를 설립, 애니메이션이 조금 더 상업적인 형태로 보여 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실험해 왔다. 2012년, 단편 영화 ‘창’을 국내 최초로 일반 극장에 개봉시켰다. ‘창’은 IPTV와 웹에서도 동시 상영됐다. 2014년에는 ‘발광하는 현대사’를 통해 19금 애니메이션 시장에 뛰어들었다. 섹스를 통해 관계의 역학에 대해 들여다보는 ‘발광하는 현대사’는 극장 상영을 거치지 않고 바로 IPTV와 디지털TV, 인터넷, 모바일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공개됐다.

그가 19금 애니메이션 시장에 뛰어든 이유는 분명했다. “근거죠. 투자를 받으려면 최소한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성인 웹툰을 생각했죠. 레진코믹스 등의 웹툰 플랫폼에서 상당수의 성인용 웹툰을 제작하고 있고, 그게 또 잘 되고 있어요. 그걸 근거로 댄 거죠. ‘봐라, 성인 웹툰이 되지 않았냐. 성인용 IPTV 시장도 된다’는 걸요. 애니메이션이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면, 보다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확보될 거라 믿었어요.” 연상호 감독은 현재 ‘졸업반’이라는 야한 컨셉의 애니메이션을 후반작업 중이다. 이를 통해 ‘발광하는 현대사’의 업적을 이어갈 예정이다.

다시 ‘부산행’과 ‘서울역’으로 돌아가 보자. ‘서울역’은 좀비라는 장르적 외피를 빌려 ‘헬조선’을 그려낸다. 연상호 감독이 좀비를 통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부산행’과 같은 장르적 재미를 기대하고 ‘서울역’을 찾은 관객이라면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엔 ‘연상호 세계의 참 맛’을 발견하게 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부산행’이 ‘서울행’에 안긴 선물이다. “앞으로도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오가며 다양한 도전을 해볼 예정”이라는 연상호 감독의 앞날이 흥미로워 보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