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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모 칼럼] ‘초인가족’, 전 계층 공감할 막장 없는 힐링 드라마
입력 2017-04-26 10:39   

(사진=SBS 제공)

‘욕하면서 본다’고 했던 드라마는 이제 으레 ‘막장’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온갖 출생의 비밀이 얽히고설켜 주인공들의 관계를 복잡하게 몰아가는 것도 모자라 불륜이 판을 치는 게 일상화됐으니 흥미진진하게 보면서도 절로 입에 욕이 고이기 마련.

아침드라마나 주말드라마를 제외하면 으레 주요 등장인물은 재벌 아니면 법조인 등 상류계층이다. 다수의 시청자들이 잘 모르는 ‘그들만의 리그’라 공감하거나 현실감을 느끼긴 쉽지 않지만 몰랐던 계층의 얘기니 역시 욕을 하면서도 재미는 느낀다. 생소하거나 신기하니까.

작가들이 이렇게 스토리를 탄광의 막장으로 몰고 가는 이유는 자극에 의한 관심유도다. 설정에 대한 신기함을 유발하고, 전개와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부풀림으로써 시청률을 높이자는 의도다. 당연히 ‘파격’ ‘경악’ ‘의외’ 등의 키워드를 자아낼 플롯을 개발하는 것이다.

기획과 구성은 주변에 널린 듯하면서도 일반인의 상식을 깨는 시퀀스로 채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난 2월 시작된 SBS ‘초인가족 2017’은 그런 흥행의 규칙을 철저하게 배제함으로써 시청자를 그러모으는 신통방통한 재주를 지녔다.

월화미니시리즈가 끝난 월요일 밤 11시대에 방송됨에도 고소영 주연의 KBS2 ‘완벽한 아내’와 비슷한 4%대의 시청률을 올릴 정도로 선전 중이다. 시청률의 3대 요소인 ‘톱스타 악역(밉상) 막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은 지극히 평범하거나 생활에 찌든 ‘보통사람’들이 초인적인 의지로 이 힘들고 험악한 세상을 꿋꿋이 살아간다는 의미다. 주인공은 도레미주류 영업2팀 만년과장 나천일(45살. 박혁권) 아내 맹라연(40살. 박선영) 무남독녀 익희(15살. 김지민) 가족.

고소영 이영애 정도 톱스타 혹은 엄청난 화제성 캐스팅은 없다. 오히려 박혁권의 주연 캐스팅이 다소 파격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이다. 라연의 친정 식구나 이웃, 혹은 도레미 임직원 중 악역을 심을 법도 한데 온통 선한 사람 일색이다.

막장이라면 사춘기라 부모에게 까칠하거나 데면데면한 익희가 서운해 복수하겠다며 천일과 라연이 “사실 너는 입양아”라고 속이는 수준이다. 억지스럽고 과장되긴 하지만 그들의 어설픈 ‘발연기’는 외려 귀엽다. 그 어색한 연기에서 거짓임을 읽고 역으로 속는 척 부모를 골탕 먹이는 익희가 더 영악해 되레 소름이 끼치긴 하지만 결국 깨가 쏟아질 만큼 애교 넘치고 단란한 가족이라 훈훈하다.

천일은 익희가 부산으로 여행을 가겠다고 하자 화들짝 놀라 반대하는가 하면 직장에서 “내가 그때는~” “요즘 신입사원들은~”이라며 젊은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전형적인 ‘꼰대’의 모습을 보인다. 그와 라연이 딸과의 소통방법으로 찾은 것은 신조어 익히기.

회사 후배 박 대리(김기리)의 조카들에게 4만원어치 커피를 사주면서까지 속성으로 신조어를 배울 뿐만 아니라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을 외우지만 더 ‘아재’로 찍히자 사투 끝에 지코의 ‘버뮤다 트라이앵글’을 그럴 듯하게 ‘완창’한다. 익희는 천일에게 ‘별로’라고 시큰둥하게 반응해 서운하게 만들지만 사실은 휴대전화에 녹화한 뒤 되돌려보며 ‘귀엽다’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라연은 홀어머니 조 여사(김혜옥)의 다섯 딸 중 딱 중간인 셋째. 계약만료를 앞두고 집주인이 전세금을 4000만 원이나 올려달라고 압박하자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 뒤 서운함에 원망만 쌓는다. 조 여사는 얼마 전 둘째 사정이 딱해 빌려줬는데 만약 그 사실이 알려질 경우 둘째가 자매들에게 집중공격을 받을 것을 우려해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

성적표를 받아 쥔 익희는 그만 울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다. 또 딱 중간이다. 중간 성적이 지겨워서 이번엔 코피를 흘려가며 공부했는데 진전이 없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는 옛말을 원망하고 저주한다.

이렇게 딱 중간인 세 명의 가족은 결국 ‘평범해서 행복하다’며 서로를 얼싸안는다. 매번 설문조사 때마다 드러나는 우리 국민의 착각 중 하나는 자신이 중산층이라는 환상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만큼 중간이 어렵고, 중간만 돼도 행복이 보장된다는 의미다.

천일과 라연은 16년차 부부. 라연은 ‘결혼 10년 차 부부의 하루 입맞춤 횟수 고작 1.1회’라는 뉴스가 언론조작이라고 분통을 터뜨릴 정도로 부부관계가 요원하다. 천일에게 “어떻게 된 게 난 결혼하고 난 후 점점 순결해져”라고 분노하고, 친정식구들에게 “남편이 날 지나치게 아껴서 보호수로 지정될 지경”이라며 탄식한다.

그러나 라연은 남편이 말없이 자주 장인의 납골당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쩜 우린 표현에 인색해진 게 아니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걸지도 모른다. 난 화끈한 남자와 살고 있진 않지만, 따뜻한 남자와 살고 있는 건 분명하다”며 남편의 애정을 확인한다.

‘초인가족’은 제목처럼 반어법적 대사와 구성을 지킨다. 모든 게 과장되고 유치한 코미디지만 그래서 콕콕 피부 속에 깊숙하게 박히고 정서를 파고든다. 먼저 기존 히트 드라마를 도용하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대범함이 큰 무기다.

천일과 라연은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다모’의 대사를 빌리는가 하면 ‘시크릿 가든’의 현빈과 하지원의 윗몸일으키기 키스 장면을 베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천일은 과감하게도 “나, ‘도깨비’의 공유 같지 않아?”라고 내뱉는다.

그렇게 유치가 키워드다. 라익희는 나이키에서, 맹라연은 미국 여배우 멕 라이언에서 따왔다는 설정은 '허무개그' 수준이지만 왠지 낯설지 않아 친숙하다. 천일이 구사하는 ‘아재개그’의 정서와 일맥상통한다.

물론 대다수 시청자도 그런 것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반응이다. 워낙 전체 플롯이 생활밀착형이기 때문에 이웃 혹은 자신의 얘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일과 라연이 방백 형식으로 시청자에게 말을 걸며 진행되는 연출기법도 한 몫 한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이렇게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주인공들이 화제성 높은, 몸값이 어마어마한 대스타가 아니라 친숙하고, 그래서 그들의 연기가 사실적으로 와 닿는다. 심지어 천일과 라연이 열등감을 느끼는 옆집 남편이나 아내가 그렇게 대단한 부자거나 엄청난 미남 미녀가 아니어서 현실감을 준다.

신혼인 박 대리가 ‘패닉’ 상태에 빠져 있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천일이 이유를 묻는다. 박 대리는 “곧 아빠가 되는데 기쁜 일인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25세에서 39세의 여자 중 미혼자가 급증하는 ‘N포세대’ 시대를 그리는 살 떨리는 현실이다.

박 대리의 아내는 출산준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 ‘고작’ 중소기업의 대리가 세 식구의 생계를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살벌한 현실은 자식이라는 인생 최고의 선물조차 기뻐할 겨를을 안 준다. 출산만 독려하고 복지정책은 열악한 사회구조에 대한 비난이다.

이 드라마는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라는 ‘도깨비’를 연상케 한다. 첫 회에 세 식구는 중간임을 한탄하다 결국 중간이어서 좋다고 자위하며 서로 위로한다. 좋은 날(1등)도, 좋지 않은 날(꼴등)도, 적당한 날(중간)도 모두 나름대로 존재의 이유를 갖추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내려가는 걸 걱정하는 1등이나, 1등이 되고 싶지만 요원해 괴로운 꼴등보단 중간이 낫다는, 중간을 바라는 게 상대적으로 쉽다는 의미로 플라톤의 중용사상과 ‘중용’의 철학을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