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방송되는 KBS1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참혹한 전쟁의 기억 속 한 끼의 기억을 따라가며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바람을 담는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를 뒤흔든 총성과 함께 시작된 1129일간의 전쟁. 7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 그 날의 아픔 속에는 살아남기 위해 먹어야 했던 간절한 음식의 기억들이 있다.
임진강이 흐르는 휴전선 접경 지역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 마을 사람들에겐 일터이고 놀이터였던 곳이 순식간에 전쟁터로 바뀌고, 38선으로 마을이 나뉘어 전쟁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연천의 높은 고지에서는 끝없는 전투가 이어졌고 ‘지게부대’라 불리던 노무단도 생겨났다. 10대에서 60대까지 속한 노무단은 전투 현장을 누비며 전쟁에 필요한 탄약과 식량 등 보급품을 전달했다.
전쟁 3개월 만에 낙동강 유역까지 밀린 전세, 부족한 병역을 위해 전쟁터로 나선 소년들이 있었다. 군번도 없이 전쟁터로 나섰던 학도병들.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포항여중 전투와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숨은 주역인 장사상륙작전은 수많은 어린 목숨을 희생해야 했다. 당시 17살의 나이로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했던 손주형 씨와 학도병들은 12시간여의 사투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고, 포항시민들의 피란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참혹하고 긴 시간 속 ‘어머니’를 외치며 쓰러진 친구들은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일주일에 몇 번씩 치열했던 전쟁꿈을 꾼다는 그는 평생 그날의 아픔을 잊지 못하고 살아왔다.
‘장사리 고지를 탈환하라’는 작전명령 174호.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북한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 작전으로 수많은 학도병과 일반인이 목숨을 잃었다. 772명이 타고 있던 문산호는 폭풍에 좌초되었고 수많은 학도병이 높은 파도와 빗발치는 총알과 싸우며 상륙해 작전을 이어 나갔다.
장사상륙작전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류병추, 김재한 그리고 일반인 지원자로 참전했던 배수용 씨는 상륙에는 성공했지만 배급받았던 미숫가루와 건빵이 바닷물에 다 젖어버려 이후에는 배고픔과의 사투를 이어나가야 했다. 바닷물에 젖은 미숫가루와 건빵을 먹고 배탈이 나기도 하고 흙 속에서 캐낸 생고구마를 먹기도 했다고. 민가에서 밀가루를 구한 날은 다 같이 모여 수제비를 끓여 먹고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날은 된장만 먹기도 했다는 그들. 어린 나이, 군번도 없이 전투에 참전했던 그들의 70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만나본다.
전 국토의 80%가 파괴된 한국전쟁은 전방과 후방, 군인과 민간인이 따로 없는 그야말로 총력전이었다. 민간인의 신분으로 전장을 누빈 사람 중에는 화가들도 있었다. 전투 현장을 종군하며 전쟁의 참상을 화폭에 옮긴 종군화가가 그들이다.
올해 102세의 이준 화가는 1950년 9월 우신출 화가, 유치환 시인 등과 함께 종군에 나섰던 기억을 아직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민족의 참상을 차마 그림으로 옮길 수 없었다고 말하는 그의 증언처럼, 종군화의 대부분은 치열한 전투 뒤에 숨은 전쟁의 또 다른 풍경들. 전장에서 돌아온 화가들도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의 삶을 버텨야 하는 전쟁 같은 피난살이를 피할 길이 없었다. 당대 모든 화가의 피난처가 되어준 곳은 임시 수도 부산.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민간인을 태운 마지막 피난선으로, 정원이 60명밖에 안 되는 화물선에 군수품을 버리고 14,000명의 피란민을 태워 거제도로 도착한다.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는 비좁은 배 안에서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배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김치’라는 애칭으로 불렸고, 그중 마지막으로 태어나 ‘김치 5’로 불렸던 이가 바로 거제에서 수의사로 일하고 있는 이경필 씨다. 아기가 있는 이경필 씨 부모님은 장승포에서 가까운 옥화마을에 정착할 수 있게 배려를 받는 등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사진관을 운영하며 일찍 자리를 잡았지만,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길어야 보름일 거라며 고향을 떠난 그 길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