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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우의 칸시네마] ‘클레어의 카메라’, 홍상수 카메라에 찍히기 전 김민희와 지금의 김민희는 다르다
입력 2017-05-22 20:10    수정 2017-05-22 20:10

하룻밤의 꿈같은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를 풀어낸 과정 역시 일정부분 꿈같다. ‘클레어의 카메라’는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기간에 촬영된 영화다. 당시 김민희는 영화 ‘아가씨’로, 이자벨 위페르는 ‘엘르’로 칸영화제에 초청받았다. 홍상수 감독은 그런 두 배우의 시간 일정 부분을 확보, 2주 만에 ‘클레어의 카메라’를 완성했다. 보통 영화들의 준비 시간과 촬영 기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계획이자, 매직 같은 일이다. 대본 없이, 상황에 유동적으로 반응하는 홍상수 감독 특유의 작업 방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1일(현지시간) 제70회 칸국제영화제 특별상영 부문에서 공개된 '클레어의 카메라'는 홍상수의 20번째 장편영화다. 효율의 끝판이랄까. 배경은 칸국제영화제다. 칸 출장 중인 영화사 직원 만희(김민희)는 어느 날 갑자기 상사 양혜(장미희)에게 해고 통보를 받는다. “정직하지 않다”는 게 양혜가 밝힌 해고 이유인데, 만희는 이를 납득할 수 없다. 당황한 만희는 칸에 머물며 마음을 정리한다. 영화제 참석을 위해 칸을 방문한 소 감독(정진영)은 만희의 해고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파리에서 온 선생님 클레어(위페르)는 우연히 소 감독, 양혜, 만희 등을 만나 그들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는다.

홍상수의 소유격으로 불릴만한 지점은 차고 넘친다. 여전히 그의 등장인물들은 술집 또는 카페에서 긴 말들을 주고받고, 우연히 만나 기이한 인연을 맺거나, 표리부동 행동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클레어의 카메라’ 속 시간은 ‘북촌방향’이 그랬듯 일상적인 흐름에서 비켜가 있다. 이 시간들을 해체하고, 재조립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클레어의 ‘카메라’다. 영화는 클레어의 카메라에 찍힌 이미지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서사의 단서를 조금씩 흘린다. 여러 인물과 사건과 시간이 카메라라는 피사체로 모여드는 이 영화는 뚜렷한 인과대신 우연이란 이름으로 묶인다.

관객은 클레어가 먼저 만난 사람이 만희인지, 소 감독인지 알기 힘들다. 이는 1부와 2부의 시간 순서가 모호했던 홍상수의 전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와 맞닿아 있기도 한데, 이번에도 홍상수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시간 사이로 관객 스스로가 들어가 음미하길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클레어의 대사와도 의미심장하게 연결된다. 그녀는 “사진에 찍힌 당신은 조금 전의 당신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천천히 내 눈을 보면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도 말한다. ‘성급한 판단’ 혹은 ‘편견’을 거부하는 것으로도 보이는 이 대사는 아마 국내관객들에겐 홍상수-김민희의 관계와 엮여 다양한 화학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그렇다면 홍상수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어떤 것일까. 모두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솔직해야죠. 솔직해야 영화도 잘 만들죠”라는 영화 속 단편영화 감독의 대사에서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클레어라는 이름을 제목에 내세웠지만, ‘만희의 영화’라 해도 무방해 보이는 작품이다. 김민희는 선배 이자벨 위페르 앞에서도 전혀 기울지 않는다. 오히려 김민희가 더 반짝이는 순간이 많은데, 홍상수의 작품 안에서 김민희는 점점 더 변화하고 있다. 홍상수의 카메라에 찍히기 전의 김민희와 지금의 김민희는 분명 다르다. 사생활에 가해지는 여러 목소리와는 별개로, ‘배우 김민희’에게 그것은 ‘진화’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