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살인자의 기억법’ 설경구, 망각되지 않는 법
입력 2017-09-07 08:18   

(사진=(주)쇼박스 제공)

2017년은 배우 설경구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한 해다. 지난해 찍은 작품들이 차례로 개봉됐고, 그 중에서도 김영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가 ‘역도산’으로 몸무게를 100kg까지 증량했던 것처럼 극도로 살을 뺀 채 노역 분장을 소화했던 영화다.

“저는 오히려 살을 뺄 때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살 찌면 몸도 무겁고 체력도 떨어지고…, 이제는 다이어트에도 요령이 생겨서 시간을 두면서 빼기도 하고요. 안 먹어야 살이 빠지니 굶기는 하는데, 감량되는 걸 보면 희열도 느껴져요.”

‘살인자의 기억법’은 첫 장면부터 변신한 설경구의 모습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극 중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 김병수로 분한 그는 바짝 말라 골격이 다 드러난 얼굴 위로 핀 검버섯에 빗질 한 번 안 한 듯한 단발머리도 감당했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눈빛이다. 형형한 안광을 내뿜다가도 사라진 그의 기억처럼 초점을 잃는다.

“분장을 최대한 안 하는 방향으로 갔는데, 잡티는 필요했기 때문에 분사 형식으로 표현했어요. 영화 내내 단발 모양의 부분 가발을 썼지만 처음과 끝 부분은 짧은 머리로 촬영했죠. 처음 완성본을 보고 나니 내용보다는 제가 뭘 했는지만 보이네요.(웃음) 여긴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도 많이 남고요.”

(사진=(주)쇼박스 제공)

대체로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를 연기해 왔던 설경구가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는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과 만났다. 이는 김일성 역에 몰입한 나머지 20년을 빠져 나오지 못하는 무명 배우로 분한 ‘나의 독재자’ 이후 두 번째다.

“이 영화에 출연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어려울 것 같아서’였어요. 안 해 봤던 캐릭터인데다가, 알츠하이머 환자니 상상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무척 궁금했었어요. 이전에는 좀 단순하게 생각했었죠. ‘오아시스’나 ‘실미도’ 때는 살을 빼고, ‘역도산’ 때는 찌우고 하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캐릭터의 얼굴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모든 사람들이 살면서 얼굴의 변화를 겪잖아요. 기름기 쫙 빼고 건조한 얼굴로 가 보자는 게 극 중 김병수에 대한 저의 해석이었어요.”

원작이 워낙 유명한 작가의 베스트셀러인 탓에 영화화에 부담을 느꼈을 법도 했다. 그는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재미가 있다”는 간단한 답변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마도 원신연 감독이 소설을 가지고 바로 영화화하긴 어려웠을 거예요. 시나리오 작업을 거쳐 콘티가 변형됐죠. 영화로서는 결말을 통해 매듭을 지어줘야 하는 문제가 있으니까요. 또 영화에서는 병수와 태주(김남길 분)의 대립 구도가 새로 생기고, 제가 딸의 목숨을 구하려 고군분투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죠. 어떻게 보면 재창작이라고 생각해요. 원작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했지만 같으면 안 된다는 고민이 제게는 컸습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출연작을 ‘박하사탕’으로 꼽고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 가져다 준 아이돌급 인기에 얼떨떨해 했다. 그러면서도 설경구는 내내 ‘살인자의 기억법’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영화 촬영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는 설명이 따랐다. 고민을 안 할 수가 없던 작품이었다며 웃은 그는 영화 속에서 호흡을 맞춘 동료 배우의 말을 인용해 설경구 나름의 망각되지 않는 법을 전했다.

“제작보고회 때 오달수 선생이 했던 말이 떠올라요. ‘배우가 고민이 많고, 힘들고, 고통스러워야 관객들이 풍성한 결과물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저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즐겁게 살려고 해요. 사실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그러나 수직으로 낙하하고 싶지는 않아요. 손에 쥔 것을 부둥켜 잡고 놓지 않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잘 내려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