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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 칼럼] 재기발랄한 연말 시상식을 상상합니다
입력 2017-11-24 10:17   

▲황정민(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동쪽에서 뜬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듯 마감은 그렇게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때마다 어디 숨을 곳 없나 두리번거리기 일쑤다. 이를테면 딴짓의 교향곡을 시작한다는 말씀. 가장 흔한 딴짓은 책상 정리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결벽증까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깔끔하다고 자부하는 아재다. 마감을 미루면서까지 책상을 치울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책상 정리까지는 애써 외면하겠는데 그래도 견디기 어려운 유혹이 바로 인터넷 뉴스다. 각종 포탈사이트 뉴스와 중앙일간지 홈페이지, 인터넷 뉴스 등을 섭렵하다 보면 시간이란 녀석이 우사인 볼트라도 된 듯 이미 저만큼 달아나 있다. 그때서야 깜박이는 컴퓨터 커서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 몸뚱이 이곳저곳을 콕콕 쑤시는 듯하다. 마치 워드 프로그램의 하얀 색 바탕 위에 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이다.

최근에도 이런 악순환을 반복했다. 이번만큼은 옆길로 새지 않고 뻥 뚫린 고속도로에 들어선 스포츠카마냥 시원하게 내달리며 원고를 마치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건만. 인터넷 연예 뉴스를 클릭하는 순간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무슨무슨 시상식 생중계 중이었는데 좋아하던 배우가 마침 상을 받는 중이었다. 아! 연말이 왔구나!

다음 상은 누가 받을까 하는 궁금함에 턱밑까지 차고 올라온 마감은 이미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렇게 흥미롭게 시상식 장면을 보고 있었는데 그만 최고상을 시상할 때쯤부터 김이 빠져버렸다. 시상식의 가장 하이라이트이고 긴장감도 높아져야 할 순간이었지만 상을 주기 위해 나온 행사 주최사社 대표의 판에 박힌 얘기 때문이었다.

그날의 시상식만이 아니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지나…’로 시작하는 시상자의 얘기는 ‘남은 한 해 좋은 꿈 많이 꾸시고’를 지나 ‘내년에도 애정 어린 관심과 사랑 많이 부탁드립니다’로 대개 끝을 맺는다.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딱히 기억에 남지도 않는 말이었다.

시상식은 참으로 많지만 대상을 시상하러 나온 이들의 말은 어쩜 그리도 비슷한지. 서로 원고를 교환하지는 않을 텐데도 말이다. ‘아름다운 밤이에요’(장미희)나 ‘밥숟가락’(황정민) 등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수상 소감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재기발랄한 시상식을 상상하기 시작한 이유다. 유쾌하게 시작한 상상이니 정색하고 듣지는 마시라.

시상식에서 가장 큰 상은 역시 작품상 또는 남녀주연상, 혹은 대상이다. 이 상의 시상자가 사장님, 대표님이 아니라면 어떨까? 이를테면 평창동계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를 공개 모집했듯 시상자를 신청 받아 선정하는 거다. 방송사 게시판에 글을 가장 많이 쓴 시청자가 시상자로 무대에 오르는 장면도 흥미롭겠다. 혹은 가장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제작에 도움을 주는 밥차 운영자나 방송국 경비원 분들이 시상자로 나서는 행사는 확실히 남달라 보이겠다.

구색을 맞추자는 의도가 아니다. 작품 한 편이 만들어지기 위해 노력한 많은 이들이 연말 큰 행사의 영광을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하는 얘기다. 영화나 드라마, 예능, 시사 프로그램에 애정을 보낸 이들의 목소리도 듣고 싶은 마음에 하는 제안이다.

생중계로 방송하는 큰 무대와 평범한 이들이 과연 어울릴까라는 의문은 꼭 1년 전 많은 시민들이 답해주었다. 태블릿PC 하나로 시작한 뜨거웠던 겨울의 수많은 무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우리의 이웃이었다. 수십만 명은커녕 수백 명이 모인 무대에도 서본 경험이 없던 그들은 세상에 대한 날 선 비판과 잘못된 길로 접어든 나라의 운명을 바로 잡는 정확한 대안을 얘기했다. 우리는 이미 100만의 인파가 청중과 사회자 역할을 멋지게 수행한 광화문 토크쇼를 많이도 겪었다.

철벽같은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분명 사람들의 숫자였지만 이전에는 경험해본 적 없던 기발한 집회 문화 또한 한 몫을 했다. 통통 튀는 아이디어의 퍼포먼스와 웃긴 건지 웃픈 건지 구분하기 어렵던 구호, 피켓 문장은 특별하지 않은 이들이 권력을 평화롭게 무너뜨린 특별한 방법이었다. 수많은 시사평론가와 교수, 언론인이 당시를 두고 해박한 분석을 내놓았지만 권력의 뒤에서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이를 향해 그날 외친 ‘지랄하네! 염병하네!’만큼 날카롭지는 않았다. 길 거리의 언어로 외친 단지 두 마디로 시민의 마음을 가장 정확히 대변해주었다. 그 평범한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연말 시상식 무대에서 보고 싶다.

어김없이 1년의 끝에 서 있다. 올해 의미 있는 활동을 한 사람들을 위한 시상식이 줄줄이 열릴 예정이다. 1년 전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이뤄졌듯 비록 지금은 엉뚱한 상상이겠지만 언젠가 현실이 될 날을 바라본다. 연말 시상식을 챙겨봐야겠다.

※이 글은 특정 시상식과는 관련 없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