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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Z리뷰] 과거 현재 미래, 그 이름은 우리의 역사 ‘허스토리(HerStory)’
입력 2018-06-12 14:00   

(사진=NEW)

‘허스토리(HerStory)’, 이 영화는 제목처럼 그녀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역사를 담고 있다. 2년 전 ‘귀향’, 지난해 ‘아이 캔 스피크’, 그리고 올해엔 ‘허스토리’가 그 길을 함께 걷는다.

‘허스토리’(감독 민규동)는 관부재판을 실화로 한 작품이다. 관부재판이란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 동안 위안부 정신대 피해를 입었던 10명의 원고단과 13명의 무료 변호인들이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일본 정부에 맞서 23차례의 재판을 진행한 것을 일컫는다.

문정숙(김희애 분)은 여행사의 사장이자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를 이끄는 인물로 모든 일에 앞장서는 여장부 스타일의 인물이다. 하지만 서울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어린 나이에 삐끗해 잘못된” 사람들의 일일뿐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위안부의 아픔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16년 동안 자신의 살림을 맡아준 가정부 배정길(김해숙 분)이 위안부였으며, 여전히 고통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반성하게 된다.

부산에서 사업하는 사람치고 일본과 거래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이후 문정숙은 “혼자 잘 먹고 잘 산 게 부끄럽다”며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위안부 신고센터 운영과 일본 재판을 진행한다. “나 돈 많다”라며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는 문정숙의 말과 달리 그의 집 크기는 줄어간다.

그의 태도는 흡사 ‘변호인’의 우석(송강호 분)를 떠올리게도 한다. 다만 영웅적이지는 않다. 문정숙을 포함해 ‘허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 누구 하나 평면적인 사람이 없다. 재판의 기둥이 되어주는 문정숙은 사실 기생관광 건으로 경찰에게 영업정지 당한 적 있다. 할머니들 역시 처음부터 용기를 내는 것이 아니며, 증언이 왔다 갔다 할 때도 있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집단의 고통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개별 여성의 아픔을 다루고 싶었다”라는 민규동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원인과 결과가 명확한 사건을 인물들이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인물이 각양각색 문제점과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담는다.

(사진=NEW)

‘허스토리’가 주목하는 건 할머니들의 현재 모습. 재판 과정과 그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덤덤하게 털어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허스토리’는 과거의 고통을 재연하지 않는다. 과거를 일일이 언급하지 않고 현재만 이야기 하더라도 그 안에는 그들의 과거가 모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역사는 현재다. 그들의 몸에는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낙서가 새겨져있어 공중목욕탕에 갈 수 없다. 임신을 했다고 아기집까지 떼어버려 평생 아이를 갖지 못한 사람도 있다. 한 위안부의 아들은 유전으로 매독에 걸렸다. 충분히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이 모든 장면은 자극적으로 펼쳐지진 않는다. 하지만 할머니들 입에서 나오는 한이 서린 증언들은 말로만 들어도 눈을 질끈 감게 한다.

극중 할머니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시간이 지났으니 잊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역사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잊히는 게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에 따르면 시간은 하나의 총체적 통합체다.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극중 배정숙은 “내가 나 아닌 척 살 수는 없지 않겠냐”라고 말한다. 과거를 잊거나 감추고 산다면 현재와 미래 또한 장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영화의 배경이자 관부 재판이 일어난 지 약 2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 이야기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다. 관부재판은 당시 11개국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위안부 재판 소송 중 유일하게 일부 승소를 거둔 재판이지만, 일본의 공식 사죄는 없었으며 위안부에게 겨우 30만 엔(한화 300만 원)의 보상금을 판결한, 최초의 승리이자 완전하지 않은 승리였다. 지난해인 2017년 이 재판에 참여했던 마지막 원고 할머니가 목숨을 거둔 가운데, 그들은 현재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영화의 중심이 된 김희애는 최근작 중 가장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인다. 부산사투리와 일본어는 물론, 쇼트커트에 흰머리, 잠자리안경 등으로 당찬 사장 캐릭터를 소화하며 본인의 필모그래피뿐만 아니라 한국영화 전체를 놓고 봐도 주목할 만한 캐릭터를 완성시켰다. 김해숙은 섬세한 연기를 통해 아픔을 담담히 연기하며, 문숙, 예수정, 이용녀 역시 깊은 연기 내공으로 관객을 당시 시대상으로 끌고 들어온다. 김선영은 ‘군함도’ ‘미씽’에 이어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신을 사로잡으며, 이유영은 여리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여행사 직원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했다. 여기에 한지민, 안세하, 정인기 등이 깜짝 출연해 특별함을 더한다.

한편, ‘허스토리’는 오는 27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