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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베테랑·밀정’…영화, 은행권과 사랑에 빠지다
입력 2016-08-29 11:28    수정 2016-08-29 13:22

▲'부산행''인천상륙작전''밀정', 기업은행이 투자한 영화들

“고객님 적금에 관심이 많으시면, 이 상품 한 번 가입해 보시겠습니까?”

지난해 여름, 하나은행에 갔다가 은행 직원으로부터 금융 상품을 하나 추천받았다. 영화 ‘베테랑’의 관객 수가 많아질수록 금리가 올라간다는, ‘하나 무비 정기예금 베테랑’ 상품이었다. 솔깃하긴 했으나, 충동적이지 않은 소비자라 자부하며 칼 같이 거절하고 은행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베테랑’의 흥행을 지켜보며 뒤늦은 아쉬움에 고개를 숙였다.

영화와 연계한 금융상품은 ‘하나 무비 정기예금 베테랑’만이 아니다. ‘인천상륙작전통장’(IBK기업은행), ‘시네마정기예금 변호인’(우리은행), ‘무비 정기예금-터널’(KEB하나은행)……. 한번 쯤 들어봤거나, 가입 권유를 받았거나, 혹은 가입한 금융상품이 있을지 모르겠다.

은행이 영화 제작사에 저금리로 대출을 해주거나 직접 투자에 나서는 것도 늘어나는 추세다. 만성적인 자금난에 허덕이는 영화계로서는 든든한 자금줄이, 저금리·저수익 기조에 부딪힌 은행들에겐 또 하나의 수익원이 되면서 ‘윈윈(WIN-WIN)’하는 분위기다.

이러한 흐름의 최전선에 있는 게 기업은행이다. 기업은행이 영화 투자에서 보여준 안목은 실로 놀랍다. 투자하는 영화마다 ‘대박’을 냈기 때문이다. 올 여름, 기업은행은 극장가의 숨은 승리자였다. 기업은행은 ‘부산행’에 15억 원을 투자했다. 결과는 알다시피 ‘대박’이었다. 영화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기업은행의 금고를 든든하게 채웠다.

‘인천상륙작전’은 기업은행이 보다 깊숙이 개입한 경우다. 이 영화에 기업은행이 투자한 금액은 35억원. 역대 최대 수준이다. 기업은행은 나머지 투자금을 끌어 모으는 역할까지 했다. ‘인천상륙작전’이 바이오기업 셀트리온을 투자사로 만나는 데에는 기업은행의 가교 역할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초반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전국 500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중이다. 내달 개봉하는 김지운 감독의 신작 ‘밀정’에도 투자한 기업은행은 ‘3연타 대박’을 꿈꾸고 있다.

기업은행은 앞서 ‘수상한 그녀’(230%), ‘관상’(140%), ‘명량’(118%), ‘국제시장’(93.8%), ‘연평해전’(86.7%) 등에서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투자 금액 대비 244%라는 기록적인 수익률을 안긴 ‘베테랑’에 투자한 건 그야말로 베테랑다운 선택이었다.

기업은행의 안목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니다. 2012년 기업은행은 금융권 최초로 ‘문화콘텐츠금융부’라는 독특한 부서를 신설했다. 문화·콘텐츠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특수 목적의 부서였다. 전례가 없는 부서였음으로 부담은 있었다. 게다가 문화콘텐츠산업은 고위험 산업군으로 인식되는 만큼 은행권이 기피해 온 것이 사실.

이러한 부담을 기업은행은 외부 전문가들을 영입하는 방법으로 풀어나갔다. ‘올드보이’를 만들고 쇼이스트에서 활약한 영화인 윤성욱을 비롯 방송 콘텐츠사, 콘텐츠진흥원, 영화제 사무국 출신 경력자들을 대거 스카우트했다. 은행 안에 웬만한 영화 투자사 맞먹는 팀이 버티고 있는 셈인데, 이들은 매달 6~7개가 넘는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출연배우의 인지도, 감독의 과거 작품 등을 검토해 투자여부를 결정한다.

기업은행의 파격 행보는 영화 제작사에게 실질적인 힘이 된다. 영화 ‘연평해전’의 흥행에 기업은행이 있었다는 건 유명한 일화. ‘연평해전’은 기업은행이 투자주관사로 참여한 최초의 작품이다. 자금난으로 몇 번이나 제작무산 위기에 봉착했던 ‘연평해전’은 기업은행을 만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고, 전국 600만 관객을 만났다.

상황이 이쯤 되니, ‘기업은행이 투자하면 대박 난다’는 입소문이 도는 것도 괜한 게 아니다. 기업은행의 행보는 타 은행권들을 적지 않게 자극하는 모양새다. 영화 시장이 커지고, 영화가 한 번 터질 경우 그 규모가 기대 이상이다 보니, 충무로에 쏠리는 은행권의 관심이 이전과 다른 분위기인 게 사실. 케이블TV-인터넷 및 모바일 다운로드-VOD 등 부가수익까지 이어지는 영화라는 신세계에 은행권이 눈독을 들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 모르겠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이 문화콘텐츠 투자를 늘리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충무로와 은행권의 동침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