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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손현주, 보통의 존재, 보통 이상의 배우
입력 2017-03-27 10:51    수정 2017-03-28 09:46

(사진=오퍼스픽쳐스 제공)

드라마 ‘추적자’ 이후 이어진 행보로 인해 근 몇 년 사이 ‘스릴러 전문배우’라는 수식어를 얻은 손현주지만, 그의 연기 인생 전체를 추동하는 진짜 동력은 소시민적 친근함과 애잔함이다. 후줄근한 추리닝을 입고 통기타를 치던 ‘첫사랑’의 무명가수 주정남, 아픈 아내(최진실)를 웃게 해주겠다고 내복 바람으로 춤추던 반성문,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조강지처 클럽’의 기러기 아빠 길억 등 그는 수많은 작품에서 ‘가장 보통의 존재’를 살갑게 연기하며 우리 시대 소시민들을 위로해 왔다.

그런 손현주에게 ‘보통사람’이란 단어는 이물감 없이 잘 어울린다. 영화 ‘보통사람’에서 손현주는 아픈 아들과 말 못하는 아내를 둔 강력계 형사 성진을 연기한다. 당초 ‘공작’이었던 영화 제목이 어감도 느낌도 너무 다른 ‘보통사람’으로 과감하게 이름을 바꿔달 수 있었던 데에는, 아마도 손현주라는 배우가 구축해 둔 이미지가 한 몫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보통사람’은 정치·사회적 격동기였던 80년대를 배경으로, 그 안에 놓인 보통의 가족을 이야기 한다. 톤이 다른 두 가지 축을 조율하지 못하면 이야기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설정.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내는 것이 바로 손현주다. 손현주는 모든 장면 장면에 ‘인간’적 매력을 흘리며, 둘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간다. 사람 냄새 나는 배우의 힘이다.

Q. ‘악의 연대기’ 인터뷰 때, 약속에 늦을 까봐 인터뷰 기간 내내 근처 모텔에 묵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손현주:
지금도 매니저와 모텔에서 묵다 왔어요.(일동탄식) 집이 멀지는 않은데 습관이 돼서…(웃음) 약속이 제겐 가장 중요합니다. 어젠 (제가 출연한) 예능 ‘해피투게더’를 잠깐 보고, 닭곰탕에 소주 한 잔을 마셨어요. 제가 잘 가는 곳이 종로3가 5번 출구 포장마차 촌입니다

Q. 아주머니들이 좋아하시겠어요.
손현주:
네. 음식을 더 주세요.(웃음) 음식을 데워달라고 부탁할 땐 제가 직접 갑니다. 그래야 리필을 좀 더 해주시거든요.

(사진=오퍼스픽쳐스 제공)

Q. ‘보통사람’ 개봉까지 오래 기다리신 걸로 알아요.
손현주:
저보다는 김봉한 감독님이 더 오래 기다리셨죠. 원래는 1970년대 연쇄살인마 김대두와 여러 사건을 결합해서 만들려고 했던 영화입니다. 회의를 거치면서 민감한 이야기들이 수정됐어요. 제목도 원래는 ‘공작’이었어요. 그런데 이후 ‘공작’ 이름 관련 영화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공조’ ‘공작’ ‘조작(된 도시)’…(일동웃음) “우리가 피하자. 제목이라도 비켜가자” 해서 최종적으로 ‘보통사람’이 됐죠.

Q. 민감한 이야기 때문에 투자가 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80년대로 시대가 바뀐 이유인가요.
손현주:
2-3년 전만해도 아무래도…….

Q. (박근혜 정부의) 억압이 많았죠!
손현주:
네. 그런데 그때는 또 그게 억압이라는 걸 잘 모르기도 했습니다.

Q. 지금은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밝혀졌지만 말입니다.
손현주:
네. 경직된 분위기가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왜 영화 투자가 안 될까”란 이야기를 동료들과 나누곤 했죠. 말을 하는 게 조금 조심스럽긴 한데, 나라에서 받는 모태펀트를 못 받은 건 사실입니다. 결국 크라우드 펀딩으로 변경돼서 영화가 진행했죠.

Q. 정부 정책이 이상하다는 걸 피부로 체감하고 계셨을 텐데요, 피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보통사람’에 출연한 이유는 뭔가요.
손현주:
딱 하나입니다. 문화는 문화로 봐 줬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이었죠. 이게 정치 영화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위에 있는 분들 생각이고, 우리는 문화를 만드는 거죠.

(사진=오퍼스픽쳐스 제공)

Q. 문화는 문화로 봐 줬으면 한다고 하셨는데, 영화가 지니고 있는 기능 중엔 문화를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주는 것도 있기는 합니다.
손현주:
그럼요. 그래서 제게도 호불호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저와 안 맞는 영화도 분명 있습니다. 그런 건 자연스럽게 외면하게 되죠. 재미있다/재미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저와 맞느냐/안 맞느냐의 문제인 겁니다.

Q 70년대에서 80년대로 설정을 옮긴 ‘보통사람’ 시나리오는 어땠습니까.
손현주:
70년대와 80년대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정권으로 보면 연장선에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물론 80년대가 시기적으로는 70년대 보다 조금 더 부드러웠죠. 프로야구와 같은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보통사람’이 80년대를 대변한다고는 말씀드리지 못할 겁니다. 누군가에겐 여전히 독재타도를 위한 처절한 시대였지만, 그걸 체감하지 못하고 지나간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 면에서 우리 영화는 단편적이죠.

Q. 속해 있는 사회가 경직됐는지 아닌지. 막상 당시에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죠.
손현주:
맞아요. 지금이니까 더 보이는 게 분명 있죠. 제가 84학번인데, 대학 때 연극을 했기에 사회 돌아가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죠. 그럼에도 당시 대학생 중에는 남산 지하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아는 분도 많았습니다.

Q. 실제로 80년대를 ‘낭만의 시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손현주:
그럼요. 저 역시 기차를 타고 청평-대성리-강촌에 MT를 갔는데, 그게 저희에겐 나름 낭만이었죠. 그런데 통기타를 맨 사람은 없었어요. 그건 70년대! 80년대는 마이마이(mymy)를 들었던 시대입니다.

Q. 그렇다면 70년대는 손현주 씨에게 어떻게 남아있나요?
손현주:
70년대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게 그냥 갔어요. 제가 양정중학교를 나왔는데, 서부역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호외’를 받은 기억이 나요. 그걸 보면서 이거 혹시 ‘삐라’(선동하는 글이 담긴 종이) 아닌가 걱정을 했었죠. 경찰서에 ‘삐라’를 가져다주면 연필 같은 선물을 주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땐 또 군복 입은 선생님들이 많았어요. 무서웠죠.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무서워요.

(사진=오퍼스픽쳐스 제공)

Q. 시대의 공기가 딸려 오나 봐요.
손현주:
숨 죽였던 시절이죠. 지금 제 아들이 질풍노도의 시기인 중학교 2학년인데, 굉장히 자유롭더라고요. 아마 아빠 시절을 이야기 하면 납득 못할 겁니다. 그런데 그땐 그런 줄 알았던 거죠. 70년대는 저에게 회색빛에 가까워요.

Q. 그러다가 대학 때, 연극을 하며 진짜 사회를 보셨군요.
손현주:
80년대에는 놀이문화가 많이 없었습니다. 막걸리 집에 모여 이야기 하는 게 놀이였죠. 제가 연극과였는데 문창과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Q. 문창과 친구들과의 술자리 주제는 어떤 것이었나요.
손현주:
시국이나, 책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제가 알아듣지 못하는 문학 이야기를 나눌 때도 많았어요. 그래도 들었죠. 그네들의 심도 깊은 이야기를. 재미없지 않았거든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더욱 그 친구들이 저보다 커 보였어요. 문학에 박학다식하고, 시사에 대해서도 많은 걸 접하는 친구들이었어요. 정신적으로 성숙했던 사람들이죠. 지금도 만나요. 잡지사에 있는 친구도 있고, 시인도 있습니다.

Q. ‘보통사람’에서 시대를 읽게 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바나나죠. 그땐 바나나가 그렇게 귀했다고요.
손현주:
그런데 바나나가 더 귀한 시절은 70년대에요. 80년대에도 귀하긴 했는데, 70년대에 비하면 많이 구경할 수 있었던 시절이죠. 전 바나나보다 피자 생각이 나는데, 피자를 처음 먹었던 게 대학교 1학년 때에요. 80년대, 방배동 카페 골목이 막 생길 때였죠. 그 곳 카페를 갔는데, 친구가 뭘 하나 시키더라고요. 봤더니 커다란 철판에 빈대떡 같은 게 나오는 거예요. 뭔지 모른다고 하면 창피하니까 가만히 있었죠. 주인이 도르레 같은 걸 가져다주니까 친구가 그걸 막 긋더라고요. ‘저걸 어떻게 먹나’ 지켜보고는 따라 먹었죠. 손에 들고 먹더라고요. 그게 제 첫 피자였습니다.

Q. 처음 만나는 피자 맛은 어땠나요?
손현주:
제가 이전까지 먹어보지 못한 맛이었습니다.(일동웃음) ‘이게 무슨 맛인가’ 한참 생각했죠.

(사진=오퍼스픽쳐스 제공)

Q 연기하신 강력계 형사 성진에 대해서는 얼마나 공감하셨습니까.
손현주:
가서는 안 될 경계선을 두고 누군가 나에게 거래를 걸어온다면 굉장히 혼란스러울 것 같아요. 내 아내와 내 아이가 달렸다면, 고민은 더 커지겠죠. 그래서 요즘 ‘보통사람’의 정의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중산층이 많았어요. 가운데가 바나나 우유 같은 항아리 모양의 시대였죠. 지금은 달라졌어요. 피라미드 형태로 위-아래 격차가 너무 벌어져 버렸어요. 이런 사화에서 평범한 보통사람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 생각합니다.

Q. ‘추적자’에서 대통령 후보 강동윤(김상중)이 이런 말을 했죠. “선택의 순간이 오면 그때서야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라고.
손현주:
저도 그 대사, 자주 떠올려요. 성진과 같은 제안이 온다면 손현주라는 보통사람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인터뷰 자리라고 해서 “제 양심을 지킬 겁니다”라고는 말씀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Q. 살아오면서 성진처럼 돈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 선 적이 있으신지요.
손현주:
있죠. 밤무대 업소와 얽힌 사연이 있습니다. 1996년도에 드라마 ‘첫사랑’에서 작곡가를 연기했는데,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라는 드라마 속 노래가 유행을 했어요. 드라마가 종료도 안 됐는데, 많은 밤무대 업소에서 행사 요청이 왔죠. 당시엔 제가 먼지 같은 존재라 출연료도 많지 않을 때였습니다. 제 출연료의 몇 배를 주겠다고 하니 유혹을 느꼈죠. 하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업소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배우는 연기 무대에 서야 한다는 자존심 때문에 안 갔어요. 그러다가, 2-3년 후엔 갔습니다.(일동웃음) 그 유혹이 끈질기게 몇 년을 가더라고요.

Q. 2-3년 후에는 왜 가셨나요?
손현주:
용돈 때문에…(웃음) 우리 아이도 계속 학교를 다녀야 했고요. 사실 ‘첫사랑’을 하고 나서 방송을 좀 쉬었어요. ‘첫사랑’ 이후에 너무 비슷한 캐릭터만 들어오는데,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애가 자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방송을 쉬었습니다. 그 시기에 지방 행사를 몇 번 한 거죠. 그때 (설)운도 형, (조)항조 형, 혜은이-방실이 누나를 만나 인사도 나눴죠.

(사진=오퍼스픽쳐스 제공)

Q. 유혹이란 표현을 쓰셨지만, 별 다른 잡음 없이 지금까지 달려오셨습니다. 동료들의 존경을 받으며 말이죠.
손현주:
일탈에 대한 생각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연기를 하려면 참아야한다고 봐요. 대한민국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대한마을’이잖아요? 동네에요. 누구누구 통하면 다 알아요. 그런 조그만 나라에서 SNS도 대단히 발달돼 있어요. 그러다보니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죠. 후배들에게 “그걸 지킬 자신이 없으면, 배우 하지 말라”고 종종 이야기 합니다.

Q. 자기 관리가 엄격하네요.
손현주:
하나 삐끗하면 두 개 잘못되긴 쉽거든요. 연극을 배웠을 때의 마음을 아직 갖고 있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 시절이 저를 계속 잡아주고 있다고 믿어요.

Q. 연극하던 시절의 마음을 견지하며 달리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요.
손현주:
그래서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특히 시간에 대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배우에게 “연기 제발 해 주세요”라고 부탁하는 사람은 없어요. 스스로가 좋아서 혹은 필요해서 하는 일이니 책임을 지라는 거죠. 촬영 때 후배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약속은 신뢰!”라는 이야기는 꼭 합니다. 그건 사실 저 자신을 다 잡는 말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