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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모 칼럼] ‘그것만이 내 세상’, 신파와 피아노의 멋진 협연
입력 2018-01-05 10:16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최성현 감독)은 눈먼 동생한테 사기를 치려는 형의 얘기(‘형’ 2016), 죽음 앞에서 지적 장애 아들을 걱정하는 엄마의 얘기(‘채비’ 2017) 등 기시감을 주긴 하지만 나약한 시나리오의 힘을 피아노라는 음악이 감동의 오케스트라로 승화시키는 힘이 있다.

식당에서 일하는 인숙(윤여정)은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20대 아들 진태(박정민)와 산다. 진태는 인숙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피아노 실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규 수업을 받은 적은 없지만 한 번 들으면 그 이상으로 훌륭한 연주를 소화해내는 천재다. 수년 전 돌연 잠적한 미모의 천재 피아니스트 한가율(한지민)을 엄마보다 더 좋아한다.

WBC 웰터급 동양 챔피언이었던 40살 조하(이병헌)는 정해진 숙소도 없이 대학로에서 전단지를 돌려 번 돈으로 만화방에서 하루하루를 해결하고 있다. 모터사이클 수리점에서 일하는 친구와 식당에 들어갔다가 인숙을 만난다.

20여 년 전 조하의 아버지는 매일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아내 인숙과 조하를 폭행했다. 조하가 중학생 때 참다 못 한 인숙은 집을 나가 한강에 투신하려다 한 남자의 구조로 살아남았고 그와 결혼해 진태를 낳은 것. 조하는 아버지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어린 자신을 홀로 두고 도망간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런 엄마와 재회한 게 반가울 리 없고, 인숙 역시 죄책감에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고 안부를 묻지만 조하는 ‘지금에 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 쌀쌀맞게 군다. 만취해 거리를 헤매던 조하는 한 외제 승용차에 치인다. 다행히 큰 부상 없이 깨어난 그는 으리으리한 대저택으로 인도된다. 카리스마 넘치는 여자 회장이 그를 공갈협박범으로 몰고, 자존심이 상한 조하는 ‘얼마면 되겠냐’는 회장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나온다.

인숙은 모터사이클 수리점 친구를 통해 조하를 찾아 집에 데려온다. 그렇게 이부형제 조하와 진태는 한 방을 쓰는 가족이 되지만 사이가 좋을 리 만무하다. 조하는 캐나다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선배에게 갈 여비 500만 원을 만들 때까지만 어머니에게 신세를 지기로 작심한 것이다. 어느 날 엄마가 100만 원을 주면서 한 달만 진태를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은 부산에서 개업하는 식당을 도와주러 간다며.

조하는 진태를 데리고 대학로로 나가 전단지 돌리는 일을 시키다 갑자기 사라진 진태를 마로니에 광장의 피아노 앞에서 발견한다. 무아지경에 빠져 연주를 하는 진태의 얼굴에서 자신의 폭력 탓에 겁에 질린 어수룩한 바보가 아닌, 예술가의 영혼을 발견한 조하는 문득 자신을 친 운전자가 가율이었음을 떠올리고 진태를 데리고 그녀를 찾는데.

전체의 틀은 전형적인 신파조의 클리셰다. 이 시나리오의 약점을 충분히 보완하고도 남는 건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그리고 음악이다. 모든 상업영화가 틀에 박힌 기승전결을 고집하는 이유는 대다수 관객이 재미로 영화를 관람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재미가 감동이냐 웃음이냐 긴장이냐 등의 차이일 뿐.

그래서 제작진은 이 전형의 프레임 안에 색다른 메리트를 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배우는 그 짜임새를 그럴듯한 환각으로 꾸미기 위해 연기력을 깊게 쌓는 것이다. 윤여정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병헌은 이제 그 수준이 장인의 경지에 올라 징그러울 정도다. 아직도 여운이 남은 ‘마스터’의 광기나 ‘남한산성’의 소신 깊은 캐릭터를 단번에 날릴 정도로 내면적 상처가 큰 삼류 ‘양아치’를 눈부시게 소화해낸다.

영화는 이병헌이 시작해 박정민이 방점을 찍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서번트 증후군 연기는 향후 지적 장애 연기의 교과서가 될 듯 빛난다. 그의 연기는 손가락이 절반 이상 했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자폐적 정신지체를 지닌 진태의 감정의 변화는 박정민의 손가락의 움직임과 그 위치로 인해 천변만화한다. 할리우드가 선택한 한국의 대표 배우 이병헌의 포스트가 엿보인다.

주인공은 이병헌과 박정민 그리고 피아노다. 왜 영화에서 음악이 그토록 중요한지 이 작품은 충분히 웅변한다. 진태가 쇼팽과 차이콥스키 등의 클래식부터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을 연주하는 장면의 오디오는 피아노에 ‘주화입마’된 듯한 그의 표정만큼이나 몽환적이고 감동적이다.

‘불가능,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일 뿐’이라는 권투 영웅 무하마드 알리의 말이 전면에 부각되지만 진짜 주제는 소통이고 부제는 폭력이다. 조하는 아버지의 폭력에 희생됐지만 그 역시 폭력의 광기를 주체하지 못해 심판을 때려 프로 세계에서 퇴출됐다. 그것도 모자라 처음 만난 진태에게도 폭력을 휘두르고 엄마에 대한 원망을 억누르려 이종격투기 선수를 두들겨 팬다. 그는 엄마의 불통을 원망하며 살아왔지만 자신 역시 세상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건 마찬가지. 사회에 만연한 무차별 폭력과 아집의 불통을 향한 이타심과 소통의 호소다.

인숙과 여자 회장 역시 불통의 표상이다. 인숙은 조하가 거칠게 살아왔고 이기적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 하나로 그의 선의를 몰라주고 ‘형편없는 놈’이라고 폄훼한다. 여자 회장이 껄렁한 조하를 확인해보지도 않고 공갈범으로 모는 건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바라보는 편견의 메타포다.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하나로 사람들을 예단하는 불친절함과 몰상식이다.

‘조하 Vs 인숙 진태’였던 구도는 ‘조하 Vs 진태’로 흐르다가 ‘조하 Vs 가율’로 바뀌더니 ‘조하&진태&가율’로 변주되고 다시 ‘진태&피아노’로 절정부의 코러스를 연주한 뒤 ‘조하&진태’로 마무리된다. 각본 연출의 최 감독은 뻔한 선율을 훌륭한 편곡으로 꾸밈으로써 연출 데뷔작을 멋지게 완성했다. 그는 디테일이 뛰어난 감독이 될 듯하다. 조하의 아디다스 트레이닝팬츠와 운동화의 3선은 조하의 가족이다. 웃음 눈물 콧물 감동 흐뭇함 등의 감정이입은 새해 첫 가족영화로서 안성맞춤이다. 120분. 12살 이상. 17일 개봉.

유진모 ybacch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