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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Z리뷰] ‘버닝’, 동시 존재의 기억법
입력 2018-05-17 10:57   

단편소설은 ‘시’로도 불린다. 특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은 짧지만 강렬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무라카미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영화화한 ‘버닝’은 상징과 은유로 가득해 한 편의 시, 혹은 한 장의 무빙 이미지처럼 관객에게 다가온다.

※ 아래 리뷰에는 ‘버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진=파인하우스필름)

‘버닝’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먼저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려고 하지만 아직 무엇을 써야할지 모른 채 택배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종수(유아인 분), 종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이제 진실을 얘기해봐”라고 말하는 해미(전종서 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벤(스티븐연 분)까지, 세 사람은 우연성과 고의성 사이에서 만나게 된다.

영화는 종수가 한쪽 어깨에 짐을 매달고 배달을 가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유아인 특유의 떨리는 호흡은 핸드헬드 카메라를 통해 전달되고, 카메라는 끈질기게 그의 뒤통수를 바라본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함께 비틀거리던 카메라는 이내 종수에서 해미로 시선을 옮긴다.

해미의 취미는 팬터마임이다. 그는 없는 귤을 들고 껍질을 벗기고 맛있게 먹는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없다는 것을 잊으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 해미는 종수를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이 집은 하루 중 한 번만 햇빛이 들어온다. 그것도 유리에 반사되어서 들어오는 빛이기에 진짜라고는 볼 수는 없다. 해미는 종수에게 자신이 여행을 가 있는 동안 고양이 밥을 챙겨달라고 부탁한다. 종수는 고양이를 본 적 없지만 고양이의 밥과 배변을 보면서 그 존재를 믿는다. 하지만 끝까지 해미의 집에서는 고양이를 찾을 수 없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아프리카에 다녀온 해미는 벤과 함께 귀국한다. 종수는 벤의 집에서 의심스러운 물건들을 보고 벤을 연쇄살인범이라고 생각한다. 극중 인물들은 증거로 사실 관계를 파악한다. 벤 역시 눈물과 슬픔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한다. 자신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니 슬픈 감정을 느끼는지 느끼지 않는지 모른다고 한다. 증거가 없는 한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며, 증거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 되고 만다.

어느 날, 벤은 종수에게 자신이 주기적으로 비닐하우스를 방화해 왔다고 털어놓는다. 쓸모없고 눈에 거슬리는 걸 태운다고. 그동안 벤은 해미를 보며 하품을 해왔다. 이후 해미가 사라진다. 해미는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만약 해미가 죽었다면 범인은 벤일까. 주의할 점은 이날 세 사람이 함께 대마초를 피웠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대마초에는 환각 증상이 따라온다.

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종수는 그의 전시 작품으로 불타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발견한다. 벤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둔다면 이번엔 종수를 자세하게 살피게 된다. 종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고 집에 각양각색의 칼이 있으며 어린 시절 방화(엄마 옷)를 해본 기억이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 꿈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의 꿈에는 엄마 옷이 아닌 비닐하우스가 불타오른다. 해지기 전 어스름한 오후 혹은 푸른빛이 가득한 새벽, 종수는 벤이 태웠다는 비닐하우스를 찾기 위해 안개 낀 들판을 달리다가 비닐하우스 안을 들여다본다. 그의 얼굴은 흐릿하고 한치 앞을 내다보는 것마저 어렵다. 뿌연 것을 모두 닦아내면 진실과 마주할 수 있을까. 이후 종수는 벤의 집에서 해미의 고양이로 추정되는 존재를 본다. 실체를 찾았으니 이제 종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사진=CGV아트하우스)

그렇다면 범인은 종수일까. 그제야 해미가 했던 대사를 되짚어보게 된다. 해미는 아프리카에 다녀와서 ‘헝거(hunger)’에 대해 이야기 한다. ‘리틀 헝거’가 그저 배를 곯은 사람이라면, ‘그레이트 헝거’는 의미 없는 인생에서 오는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을 말한다. 해미는 종수네 집에서 “오늘이 제일 좋은 날 같다”라고 말한 후 새 흉내를 내는 그레이트 헝거 춤을 춘다. 그는 새 그림자를 손으로 만들며 놀다가 나중에는 본인이 새가 되고 만다. 해미가 사라진 후 찾은 해미의 동료는 여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토로한다. 해미는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삶이 고달팠던 사람이다.

증거는 진실을 움직인다. ‘버닝’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속 인물들은 관객에게 사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만을 보여주고 추측하게 만든다.

중요한 건 벤의 대사에 담겨있다. 벤은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도덕을 무시하는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이 도덕 없이 살 수 없으며, 도덕을 ‘동시 존재’의 균형이라고 설명한다. 영화 속 세 인물들은 따로 떨어뜨려놓을 수 없을 정도로 함께 움직이는 듯하지만(동시 존재),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되돌아보면 세 사람이 각자의 이야기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버닝’은 동시 존재하는 것들의 이야기이고, 진실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영화의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관객 역시 자신이 본 만큼만 믿음을 갖게 된다.

미스터리한 인물과 사건들, 여기에 ‘곡성’의 촬영감독이었던 홍경표 감독의 치열한 카메라 무빙, 모그의 긴장감 넘치는 배경음악까지, 148분의 긴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지만 관객을 몰입시키는데 한 치의 부족함이 없다. 청소년 관람 불가. 17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