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배순탁의 음악본능] 음악史, 계보와 차트
입력 2018-06-21 15:36   

▲방탄소년단(사진=고아라 기자 iknow@)

내 책상 서랍에는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보물이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 바로 구매해야 할 앨범을 빼곡히 적어놓은 낡은 수첩이다. 이 수첩을 애용하기 시작한 건 대학교 시절부터였다. 해외 잡지나 평론 서적을 보고 적어놓은 이 명반들을 하나씩 구매한 뒤에 줄로 쓱쓱 지워버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1990년대 중 후반 즈음의 얘기다.

이렇게 음악을 들었던 건 비단 나뿐이 아니었다. 당시 나를 포함한 거의 전부가 이런 방식으로 음악력을 쌓아나갔다. 비평가들이 선정한 명반과 차트 성적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잣대였다. 모두가 이런 과정을 통해 이른바 ‘계보’라는 것을 그려나갔고, 마치 연어처럼 이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과거의 음악 유산을 열심히 챙겼다. 혹시 ‘스쿨 오브 록’이라는 영화 본 적 있나? 주인공 잭 블랙(Jack Black)이 칠판에 나무 비슷하게 그려놓은 그림, 그게 바로 계보다. 이 계보 안에서 뮤지션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 높은 대접을 받는다. 이유인즉슨, 그 밑의 뮤지션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간주되는 까닭이다. 그렇다. 음악 역사에 있어 계보는 곧 권력 구조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즘 친구들은 차트나 비평가들의 정제된 언어 따위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흐름을 가속화한 주역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트리밍, 그리고 유튜브다. 수십 년간 쌓인 곡들을 부담스럽지 않은 비용으로, 심지어 인터넷만 되면 공짜로 언제든 접속할 수 있는 시대. 따라서 선택지는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 굳이 시대별 계보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 와중에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다.

예를 들어볼까. 먼저 다음 뮤지션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자. 샘 옥(Sam Ock), 제프 버넷(Jeff Bernat), 마마스 건(Mamas Gun) 등등. 한국과 여러 국가에서 제법 큰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정작 빌보드나 영국 차트에서 이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는 없다. 이렇게 비평가들의 대규모 조명도 받지 못하고 차트에서 명성을 휘날리지도 못했지만, 세계 곳곳에 탄탄한 팬 베이스를 지니고 있는 음악가의 숫자는 2010년대 이후로 급속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매스 미디어가 마이크로 미디어로 세분화되고, 이 마이크로 미디어(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를 통해 뮤지션과 팬이 직접 소통하면서 과거 중간 다리 역할을 해줬던 매체들의 설 자리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 과거를 상징하는 게 바로 ‘비평’과 ‘차트’다. 그래미와 빌보드의 영향력 감소, 저명한 음악 전문지 ‘롤링 스톤’의 매각 등이 이를 대표하는 현상이다.

케이팝도 마찬가지다. 싸이와 방탄소년단을 제외하면 빌보드나 영국 차트 상위권에 안착한 케이팝 뮤지션은 없었다. 그러나 잘 나가는 케이팝 가수들은 수년 전부터 전세계를 대상으로 엄청난 수익을 일궈왔다. 이건 의견이 아닌 팩트다. 심지어 케이팝은 현재 유행하고 있는 음악들 중 가장 복잡하고 역동적인 음악으로 인정 받는다. 이것 역시 내 주장이 아니다. 케이팝을 작곡하는 동시에 해외 슈퍼 스타들과도 작업하는 송라이터들의 실제 증언이다. 그들은 말한다. “케이팝은 다른 어떤 음악보다 하나의 곡 안에 다채로운 요소를 지니고 있다. 미국 스튜디오는 단순한 반복을 요구하는 반면, 케이-팝에서는 훨씬 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어 흥미롭다.”

이 지점에서 계보와 차트를 중심으로 음악을 향유했던 구세대의 입버릇, 즉 “요즘 아이돌 음악은 영 들을 게 없어”라는 단언은 철저히 무력화된다. 글쎄.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이 공유했던 권력이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트와 계보라는 권력 말이다. 사실상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들을 게 없다고 스스럼 없이 확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