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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찬욱 “제 데뷔작 보다, 형편없는 데뷔작을 만드는 감독은 드물죠”
입력 2016-06-19 09:18    수정 2016-11-30 10:28

▲'아가씨' 박찬욱 감독(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박찬욱의 세계에서 소녀들은 탈출을 감행해왔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소녀가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였다. ‘스토커’는 18살 생일을 맞은 소녀가 자신의 알을 깨고 성인의 세계로 건너가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복수 3부작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에서 인물들은 자기 딸이(혹은 누나가) 그만의 세계로 탈출하지 못하고 일찍이 꺾이자, 복수를 감행했다. 그 연장선에 있는 ‘아가씨’는 박찬욱의 여성에 대한 관심이 최전방에 서 있는 영화로 읽힌다. 단순히 레즈비언의 사랑을 그리기 때문이 아니다. 그 속에 남성중심세계에 대한 반감과 조롱, 그리고 여성들의 진짜 목소리가 과감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박찬욱을 만나 ‘아가씨’가 그리고자 한 세계에 대해, 그리고 그가 걸어온 세계에 대해 물었다.

박찬욱: 미안한데, 걸으면서 인터뷰해도 될까요? 좀 피곤해서요.

Q. 그러시죠. 많이 힘드신가요?
박찬욱: 밤에 잠을 못 잤어요.

Q. 특별한 이유라도…….
박찬욱: 오래 됐어요, 이런 불면증이.

Q. 스트레스 때문인가요?
박찬욱: 저 스스로는 제가 스트레스를 크게 받지 않는 타입이라 생각하는데, 은연중에 느끼기는 하나 봅니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미국에서 ‘스토커’를 찍을 때 이가 너무 아파서 신경치료를 받았어요. 치료 후 치통은 사라졌는데, 이런. 이번엔 입이 벌어지지 않는 거예요. 고통을 호소했더니 니콜 키드먼이 자기 치과 주치의를 소개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갔더니 오랜 시간 마취를 하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학계보고에 의하면 최장 한 달은 그럴 수 있다고요. 그렇게 한 달이 지났어요.

Q. 잠시 만요. 그 상태로 ‘스토커’를 찍으신 건가요?
박찬욱: 네. 제대로 먹지도 못했어요. 스프를 떠서 입어 넣을 때조차 너무 아파서 ‘악~’ 비명을 질렀죠. 한 달이 지나도록 나을 기미가 안 보이니까, ‘이러다가 장애인이 되는 건 아닌가’ 싶더라고요. 진심으로요. 그 상태에서 촬영을 끝냈는데, 허허. 촬영이 끝난 이튿날부터 입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때 알았죠. 스트레스라는 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찾아온다는 걸.

▲'아가씨' 촬영현장(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Q 지금 스트레스의 원인은 ‘아가씨’ 때문일 텐데요, ‘박찬욱의 퀴어 영화’를 조금 더 일찍 만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듭니다. 아주 오래 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공동경비구역 JSA’를 퀴어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는, 말씀을요.
박찬욱: 하하하. 그건, 약간… 약간 반 농담으로 한 소리였어요. 농담이 아니라면, 나만의 숨겨진 의도랄까.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잖아요. 남자들끼리 모여 있는 공간이니까. 그런 시선으로 그 영화를 다시 보면,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겁니다.

Q. ‘박쥐’는 영화 평이 크게 엇갈린 작품이었습니다. 중간이 없었죠. 극단적인 호평과, 극단적인 혹평. 그래서인가요. ‘아가씨’ 개봉을 앞두고 유독 관객 반응을 궁금해 하신 이유가.
박찬욱: 그런 이유가 없지는 않아요. 인터넷으로 반응을 찾아보지는 않아요. 대신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 듣죠. 전해 듣기로는, 이번엔 많이 웃고 편하게 스토리를 따라 온다고 하더라고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번만큼은 ‘스토리가 어렵다’ ‘따라가기 힘들다’는 소릴 듣고 싶지 않았거든요. 사람들은 제가 마치 ‘관객들이 따라오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감독’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와 일해 본 사람들은 잘 알 거예요. 제가 얼마나 관객들을 생각하며 영화를 만드는지. 그러니,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괴감이 들곤 합니다.

Q. 매번 관객을 신경 썼는데, 그럼에도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박찬욱: 제가 잘 못 만든 거죠. 만드는 사람은 그런 우를 범하기 쉽거든요. 자기가 너무 잘 아는 이야기니까, 남들도 알겠거니 하는 경우가 있어요. 가령 녹음실에서 동시녹음을 한다고 가정해 봐요. 배우가 아무리 웅얼웅얼 해도, 우리들은 그 대사를 아니까 잘 들리는 듯한 착각을 받곤 합니다. 그런데 관객은 다르죠. 객관적이죠. 결국 제가 판단을 잘못한 겁니다. 저에 대한 선입견도 작용하는 것 같아요.

Q. 당신 영화에는 기존에 보지 못한 이미지들이 등장하곤 합니다. 이미지가 이야기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죠. 그 부분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찬욱: 없지 않을 겁니다. 저에 대한 선입견도 작용한다고 생각해요. ‘박찬욱 영화에는 보이는 것 너머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내가 그걸 캐치 못하나?’ 하면서 분석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Q. 가까운 동료 감독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김지운 최동훈 등 많은 감독들이 퇴폐미 가득 머금은 ‘아가씨’를 기대한 것으로 압니다만.
박찬욱: 주위에서는 상업적이라는 이야기를 많이들 해요. 제 영화는 뭔가 불균질하고 거친 것이 특징인데, 이 영화는 너무 매끄럽게 흘러간다고 하더군요. 폭력이 약해서 실망이라는 사람도 있어요.(웃음) 하지만 이 영화에도 폭력은 분명 있죠. 코우즈키(조진웅)이 두 손으로 어린 히데코와 아내(문소리)의 얼굴을 쥐고 흔드는 장면은, 제 영화의 그 어떤 폭력보다 더 폭력적이라고 느낍니다.

Q. 많이들 ‘아가씨’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스토커’에 이은 소녀3부작이라 하더군요.
박찬욱: 네. 소녀들이 어떤 사건을 겪으며 성장한다는 면에서 그렇게들 말하더군요.

▲'아가씨' 촬영장에서의 박찬욱 감독과 배우 하정우 김민희(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Q. 세 영화 외에도 당신 작품에서 소녀들은 중요한 지분을 차지해왔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딸은 서사에서 특별한 존재였죠.
박찬욱: 아내와 딸, 두 여자와 살다 보니 여성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게 있어요.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적인 한국 사회에 살면서 능동적인 여성상을 보고 싶다는 욕구도 있습니다.

Q. 만약 아들이 있었다면, 당신의 영화세계는 달랐을까요.
박찬욱: 그럼요. 달랐겠죠. 상상하기는 싫지만 달랐을 겁니다.(웃음)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남자가 딸 둘-셋을 키우는 아빠에요. 저도 딸을 한 명 더 갖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들이 나올까봐…

Q. 왜 그렇게 아들을 꺼려하시나요?
박찬욱: 소란스러울 것 같아서요. 또 아들은 거칠잖아요. 저는 아빠들이 아들에게 해줘야 하는 것들, 가령 캐치볼 같은 걸 싫어합니다. 제가 잘 해주지 못하면, 아들이 싫어할 수 있잖아요.

Q. 여성캐릭터를 통해 보여주고 싶으신 건 뭔가요? 딸들이 살기 좋은 세상인가요.
박찬욱: 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망 같은 건 아니에요. 제가 좋아하는 인간형은 어렵고 고통받는 처지에 있다가 싸워보려 나서는 사람들인데, 상대적으로 여성들이 그럴 때가 많죠. 인간이라는 게 어떤 한계를 가진 존재인지, 인간이 만든 사회라는 게 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똑바로 볼 줄 아는 인물. 그러한 인물이 등장해서 잘못된 것은 고쳐보려고 노력하는 게 저의 관심사입니다. 그걸 가지고 거창하게 세상을 바꾼다고 까지 말하긴 어려워요. 다만 ‘그런 노력을 지켜보는 것이 멋지고, 아름답고, 숭고하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Q. 2003년도는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봉준호) ‘장화홍련’(김지운) ‘지구를 지켜라’(장준환)등의 수작이 쏟아져 나온, 그러니까 한국영화 에너지가 기이하게 뜨거웠던 해였어요. 많은 이들이 그 시절의 한국영화를 그리워하죠. 그리워한다는 것에는 지금의 한국 상업영화들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는 의미일 테고요.
박찬욱: 그때는 차승재-오정완-오기민 같은, 예술적 야심이 큰 프로듀서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거 아니야?’ 싶은 기획을 밀어붙이는 동력이 그들에겐 있었죠. 또 그런 사람들이 힘이 있었고요. 요즘 프로듀서들을 저는 잘 모르지만…그런 차이는 분명 있지 않나 싶네요.

▲'아가씨' 박찬욱 감독(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Q. 지금은 시스템적으로 평준화 된 게 있죠. 좋게 말하면 안정화고요.
박찬욱: 그렇죠. 산업적으로 안정된 거죠. 그때는 뭐랄까. 과도기였고, 뭔가 불안하게 있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가능한 것들이 있었죠. 창작자에게 허용된 것들이 많았으니까요. 결국 그때의 프로듀서나 감독들이 천재여서 좋은 영화들이 나온 건 아니에요. 그걸 가능하게 한 시대 분위기가 있었던 거죠.

Q. 만약 2016년에 신인 박찬욱이 등장해서 ‘올드보이’를 만들었다면…
박찬욱: 달랐겠죠. 다른 ‘올드보이’가 나왔을 겁니다. 재능이나 실력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를 잘 만나야 하는 게 있어요. 이를테면, 제 데뷔작 보다, 형편없는 데뷔작을 만드는 감독은 드물죠.(일동웃음)

Q. 죄송합니다. 너무 크게 웃어서.
박찬욱: 괜찮습니다.(웃음)

Q. 데뷔작이 가수 이승철 씨가 주인공이었던 ‘달은... 해가 꾸는 꿈’이죠?
박찬욱: 맞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영화감독은 저보다는 실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어떤 시대를 만나느냐에 따라 갈리는 게 있죠. 운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준비돼 있지 않은 자에게는 운도 비켜가지 않을까요.
박찬욱: 그런데, 저는 한편도 아니고, 두 편이나 ‘폭망’했기 때문에…(일동폭소) 사실 그런 상황이면 기회 자체가 오지 않는 게 맞죠. 그런데 전 기회가 왔을 뿐 아니라, 명필름이라는 당시 ‘접속’으로 아주 기세 등등했던 기획사를 만났어요. 그건 운이 많이 작용한 거죠. 조영욱 음악감독이 제 친구인데, ‘접속’을 하면서 그 친구가 명필름의 중요한 멤버가 됐어요. 조영욱 감독이 저를 명필름에 연결해 주면서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들 수 있었죠. 운이 있었습니다.

Q. 신인 감독의 ‘망작’ 하나를 보고, 그를 판단하면 안 되나 싶기도 하네요.
박찬욱:그렇죠. 허허허.

Q. ‘미쓰 홍당무’ ‘설국열차’에 제작자로 참여하셨습니다. 제작에 대한 또 다른 계획은 없으신가요.
박찬욱: 지금으로서는 없어요. 지금은 제 영화를 제작하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다른 감독들 영화를 제작하려면 사람도 많이 뽑아야 하고, 회사도 키워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아가씨' 박찬욱 감독(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Q. ‘아가씨’의 마지막 구슬 정사 씬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나뉘는 분위기입니다.
박찬욱: 네. VIP시사회 끝나고 류승완 감독이 그러더군요. 자기 뿐 아니라 많은 영화인들의 의견이라고 하면서, “백작(하정우)의 상상 씬에서 끝냈어야 한다”고요. 하지만 그렇게 끝내면 백작과 코우즈키 두 남자의 이야기가 돼 버린다고 생각했어요. 가뜩이나 영화 후반을 두 남자가 주로 차지하기 때문에 그렇게 끝내는 건, 저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죠. 그리고 애초 이 영화의 계획은 ‘두 여성의 섹스로 이야기를 끝낸다’ 였어요. 두 여성이 순수한 쾌락을 나누면서 끝내는 게 목표였죠. 그리고 구슬은 어린 히데코가 손등을 얻어맞을 때 사용된 물건이잖아요. 그 도구를 히데코가 연인과의 쾌락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전복의 쾌감이 있다고 봤습니다.

Q.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를 최고의 명대사로 꼽습니다.
박찬욱: 아, 그래요? 다행이다. 제 주위에는 다들 백작의 “XX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를 꼽던데.(웃음)

Q. 하하. 대다수의 남성들이 그 대사를 의미심장하게 꼽긴 하더군요.(웃음) 당신에게도 구원자 숙희와 같은 존재가 있다면 누구일까요.
박찬욱: 와이프입니다. 작업적으로도 영향을 많이 줘요. 영화 기획에서부터 편집-음악 등 모든 단계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의논하는 상대죠. 물론 아내는 제 인생을 망치러 온 사람은 아닙니다.(웃음)

Q. 변태적인 낭독회가 벌어지는 ‘아가씨’의 서재는 일본 세계를 동경하는 코우즈키의 취향뿐 아니라, 내재한 성적 욕망을 엿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당신에게도 당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공간이 있나요. 그리고 박찬욱의 욕망이 어떤 것일지도 궁금합니다.
박찬욱: 제가 파주에 살고 있어요. 집을 설계할 때 건축가 선생님에게 ‘글 쓰는 작업실’을 특별히 부탁했습니다. 세로로 길쭉한 방인데, 사람 몸 하나 겨우 움직일 정도의 크기에요. ‘박쥐’ 송강호가 연기한 수도사의 방과 흡사해요. 다른 가구나 장식은 없어요. 하얀 칠만 돼 있죠. 그게 저의 공간입니다.

Q. 그 말씀은, 욕망이…
박찬욱: 제겐 욕망이 별로 없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죠. 다음 영화를 투자 받을 수 있을 만큼의 흥행을 유지하면서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들고 싶을 뿐이에요. 영화 한편 한편을 어떤 마을의 건물이라고 한다면, 어떤 영화는 시청이고 어떤 영화는 꽃집이고 어떤 영화는 빵집인 거예요. 그런 것들이 모여서 마을을 형성하는 거죠. 그 마을이 다음 세대가 방문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남는 것, 그게 저의 욕망입니다.

Q. 제겐, 굉장히 큰 욕망으로 보이는군요.(웃음)
박찬욱: 하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