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後] ‘걷기왕’, 아프니까 청춘?…“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입력 2016-10-20 14:40   

(사진=CGV 아트하우스 제공)

밴드 ‘타바코 쥬스’ 드러머 출신인 감독 백승화는 “밴드 하는 사람들은 다 배고프다”는 선입견을 깨기 위해 드럼스틱 대신 카메라를 들었던 이력의 소유자다. ‘크레이지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로 2010년 세상에 나왔던 ‘반드시 크게 들을 것’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존나 열심히 안 하면 안 될 것 같애. 근데, 우린 열심히 안 하잖아.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타바코 쥬스의 권기욱이 내뱉은 이 말은 이후 인터넷을 떠돌며 하나의 시리즈로 장착했는데, 그것이 신드롬이 된 것은 단순히 달관과 자학의 페이소스 때문이 아니었다. ‘존나 열심히’ 하진 않아도, ‘자신들의 속도로 즐기며’ 음악을 하는 이들의 자세가 그 안에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 후 6년. 백승화 감독의 첫 상업 장편 영화 ‘걷기왕’에도 ‘우린 안 될 거야, 아마’의 느긋한 정서가 흐른다.

만복(심은경)이라는 이름의 소녀, 선천성멀미증후군을 지녔다. 버스는 물론이고 기차·오토바이·경운기 등 ‘탈 것’에만 올라타면 멀미로 인해 구토가 쏟아진다. 천만다행으로 학습의 결과, 걷기에 능해졌다. 왕복 4시간 거리의 고등학교도 걸어서 사뿐히 통학한다. 만복의 담임선생님(김새벽)은 그런 만복에게 경보 선수를 제안한다. 졸지에 육상선수가 된 만복. 전국 체전이 다가온다.

사람마다 능력치가 다르고, 행복의 기준 또한 천차만별이다. 누군가에겐 공무원이 되는 게 인생의 성공처럼 보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적당히 일하고 칼퇴해서 맥주나 한 잔 때리고 싶은”(진학 상담 중 지현이 담임에게 하는 말)게 진짜 꿈일 수도 있다. ‘걷기왕’은 그런 영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통념에 태클을 거는 영화. “꿈을 향해 질주하라”는 훈계 안에 은폐되고 있는 진짜 ‘나다움’을 찾아보라는 영화.

‘걷기왕’이 그려내고자 하는 삶의 속도는, 영화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속도와도 사뭇 닮았다. 자극적이지 않다. 쥐어짜는 눈물도 없다. 사소한 이야기들이 한 겹 두 겹 쌓이면서, 일상의 진짜 얼굴들이 드러난다. 만화적인 기법을 살린 오프닝, ‘타이타닉’의 주제곡 ‘마이 하트 윌 고 온(My Heart will Go on)’을 리코더로 어설프게 담아낸 OST, 개성강한 캐릭터들이 시종 미소 짓게 한다. ‘달려라 하니’ 캐릭터의 등장은 감독이 선사하는 또 하나의 재미다. 죽는 힘껏 달려 온 하니와 느긋하게 걸어 온 만복 캐릭터의 대조가 존재 자체로 이야기의 주제를 강화시킨다.

‘걷기’라는, 원초적인 행위를 품은 ‘경보’ 종목의 선택도 결과적으로 탁월했다. ‘배구왕’이나 ‘농구왕’이었다면 이 영화의 메시지가 이토록 현실적으로 다가왔을까. 그런 의미에서 퇴락한 스포츠를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했던 우문기 감독의 ‘족구왕’와 맞닿은 지점이 있다. 그러고 보니, 두 영화 모두 ‘너도 나도 스펙’을 위치는 시대에 ‘나만의 길’을 걷으라고 응원하는 이야기다. 응원하게 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