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정인지가 연기한 '조각도시'의 유모는 최대 빌런 안요한(도경수)의 뒤에서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살아있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늘 요한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존재하며, 그의 악행을 묵인하고 지지하는 기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정인지에게선 음습한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탁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조각도시'의 유모는 온데간데없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기자의 손 때 묻은 명함 지갑을 바라보며 "예쁘다"라고 감탄하는 '인간 정인지'가 그 자리에 있었다.
'조각도시'의 미스터리를 한층 끌어올린 '유모' 말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배우 정인지를 서울 마포구 사람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만났다.

지난 5일 최종화까지 모두 공개된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조각도시'는 평범한 배달부 박태중(지창욱)이 어느 날 흉악범으로 몰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고, 모든 것이 안요한에 의해 계획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에게 복수를 실행하는 액션 드라마다.
정인지가 연기한 유모는 시각장애인으로, 안요한의 유일한 가족이자 조력자로 열연했다. 그는 "시청자들이 '시즌2에 부활하는 것 아니냐', '사실은 유모가 흑막이다'라며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시는 반응이 너무 재미있었다"라며 밝게 웃었다.
유모의 트레이드마크인 희뿌연 눈동자는 CG가 아닌 특수 렌즈였다. 정인지는 리얼리티를 위해 눈동자 전체를 덮는 두꺼운 렌즈, 일명 '백탁 렌즈'를 착용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처음 껴보는 렌즈였는데 눈보다 훨씬 커서 놀랐어요. 문제는 이걸 끼면 앞이 정말 하나도 안 보인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촬영이 대부분 밤에 이뤄졌거든요. 게다가 촬영 시기가 겨울이라 스태프들 대부분 검은 롱패딩을 입고 있었고, 장비도 다 검은색이다 보니 현장에선 빛조차 구분이 안 됐습니다. 하하."
촬영 쉬는 시간, 배우 대부분은 자신이 화면에 어떻게 담겼는지 모니터 앞에 모이곤 한다. 그런데 앞이 안 보이는 탓에 정인지는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배우로서 자신이 어떻게 연기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건 큰 공포였지만, 그는 감독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카메라가 나를 찍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감독님께서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백탁의 정도, 유모의 헤어 번 위치, 의상 색감까지 치밀하게 계산해 두셨더라고요. 저는 '보이는 척' 할 필요도 없이, 안 보이는 불안함까지 감독님께 그대로 맡기고 연기했습니다."

현장에서 앞이 보이지 않았던 정인지에게 도경수는 든든한 지팡이이자 파트너였다. 정인지는 도경수와의 호흡을 묻자 "정말 멋있는 배우"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도경수 배우는 저를 정말 섬세하게 챙겨줬는데, 놀라울 정도였어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갑자기 몸을 잡으면 놀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경수 씨는 훅 들어오는 법 없이 항상 인기척을 내며 부드럽게 다가왔죠. 시각장애인의 고충을 다 알고 있는 듯했어요. 촬영 중 동선이 꼬이지 않게 조용히 자리를 바꿔주기도 했고요."
그는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는데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것처럼 진심으로 호흡하고 교감했다"라며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배려 덕분에 유모와 요한의 끈끈한 관계성이 완성된 것 같다"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②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