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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드라마틱] 눌변들의 사랑...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를 기억하며
입력 2017-03-22 14:03   

2002년 어느 여름밤 텔레비전에서 아주 이상한 남자를 보았다. 브라운관에서 목격한 모든 인물 중 가장 어눌하게 말하는 남자였다. 저렇게 연기하면 NG 아닌가 싶었다. 발음도 시선도 몸짓도 나사가 살짝 풀린 것처럼 보였다. 딱히 뭣도 없어 보였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뭔가 있어 보이는 인물들이 즉시 나타나고 사라지고 또 나타나는 세계 속에서 그의 모습은 적잖이 이상해보였고, 그런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라니 궁금하고도 걱정스러웠다.

그는 양동근이었고 드라마의 제목은 '네 멋대로 해라'였다. 등장인물 중 누구도 악역이라고 말할 수 없던 그 드라마를 기억한다. 주인공이 큰 병에 걸렸다는 설정이나 삼각관계 혹은 사각관계 구도가 특별한 것도 아니었고,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등장인물들이 아름다웠던 것도 아니었다.

꼬여있는 가족사와 경제적 사회적 계급차도 어느 드라마에나 전제된 것들이었으며 주인공이 소매치기라는 설정은 당시까지 아주 흔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참신한 것 또한 아니었다. 이 드라마의 특별함은 다름 아닌 인물들이 말하는 방식에서 드러났다.

경(이나영)은 몇 겹의 사건들을 지나면서 복수(양동근)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복수에겐 오래된 여자친구 미래(공효진)가 있는데 그녀 역시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래서 경은 미래에게 말한다. “난 언니 좋아요.”

그러자 미래가 경에게 대답한다. “난 너 싫어.”

주어+목적어+동사로만 이루어진 꾸밈없는 대사들이 이 드라마를 채운다. 미래는 복수가 아플 때면 “왜 아프고 지랄이야. 일 하느라 바빠 죽겠는데”라고 투덜대며 눈물을 닦는 사람이다. 결국 그녀를 떠나는 복수가 쓴 편지 역시도 꾸밈없기는 마찬가지다.

“미래야. 나 너 떠나.”

뺄 것도 더 할 것도 없다. 그는 자신이 눌변인 것을 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해야 하기 전에는 준비를 한다. 종이 위에 미리 대사를 적어보는 식이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여러 번 고쳐가며, 자기가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신을 사랑하고 싶은지를 적는다. 그걸 여러번 읽고 외워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 간 뒤 아주 어눌하게 말한다. 외우고 연습한 티를 감출 수 없지만 결국 다 말한다. 그런 뒤에 정적이 흐르도록 두어야 여운이 남는데 복수는 태생적으로 멋있는 건 잘 못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덧붙인다.

“멋있게 생각할라구 막 이렇게 쓰다보니까... 좀 슬프기두 하구... 뭐 좀 한숨두 나구... 뭐 눈물 콧물도...”

그러자 경이 젖은 눈으로 말을 막는다. “말 그만해요. 버벅대니까 깨잖아요.”

그들은 말을 하는 대신 손을 잡고 버스에 실려 간다. 가장 느리게 말하는 두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한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들은 영어가 서툰 사람들의 영작문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말이 서투른 사람들은 심장 떨리는 말도 꾸미거나 돌리지 않고 바로 해버리는 수밖에 없어서, 그런 두 사람이 만나면 어떤 순간에는 너무나 빠르게 서로의 마음이 만나게 된다. 국어교과서에 이 드라마의 대사들이 실리면 어떨지 상상해본 적이 많다. 눌변들의 느리고 단순한 문장들은 가끔씩 사랑의 교본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