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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 칼럼] 나는 너의 초인, 너는 나의 초인
입력 2017-03-29 09:25    수정 2017-03-29 11:30

(사진=SBS 제공)

여자친구의 아버지를 처음 만나러 가던 날. 옷장에 보관만 하던 긴 팔 정장을 꺼내 입었다. 긴장한 탓인지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신호가 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여자친구를 기다리게 하고는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막 ‘일’을 시작하려는 찰나, 복도 쪽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어! 우리 딸 왔어? 그 녀석이랑 같이 온다며. 어디 가긴, 아빠도 화장실 가려던 건데?”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나타난 그는 바로 옆 소변기에 자리를 잡았다. 아아, 미래의 장인어른을 이렇게 만날 줄이야. 그래도 어쩌랴. 인사는 해야지 싶어 국민체조 옆구리 운동하듯 재빨리 그가 서 있는 쪽을 향해 허리와 머리를 숙였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아버님!”

첫 인사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이끌고 밥부터 먹자며 그가 앞장섰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여의도공원 매점 앞. 고급 레스토랑까지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저렴한 한정식 집 정도는 갈 줄 알았는데. 간이 테이블에 상이 차려졌다. 메뉴랄 게 뻔했다. 컵라면과 김밥, 삶은 계란이 전부. 소주 두어 병과 캔맥주도 함께였다. 때는 7월인지라 등줄기는 이미 축축했다. 평소 입지도 않던 정장차림을 한 채 땀을 뻘뻘 흘리던 내게 그가 말했다.

“다음부터는 편하게 입고 와.”

‘다음부터’ 우리 셋은 자주 모였다. 그의 사무실이 있던 여의도를 시작으로 마포까지 맛집을 섭렵했다. 술 좋아하고 호탕한 그의 성격 덕분에 입고 가는 옷도 마음도 점점 더 편해졌다.

셋의 술자리는 결혼식 날까지 이어졌다. 딸의 결혼이 못내 아쉬웠는지 우리가 첫날밤을 보낼 서울의 호텔 앞까지 그가 찾아왔던 거다. 술 좋아하던 셋이 모여 그날도 호텔 근처 백반 집에서 소주 몇 병을 비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무남독녀로 자랐다지만 결혼 전까지 아내의 삶이 무탈의 연속은 아니었다. 사업체 운영이 늘 그렇듯 장인의 회사는 부침을 연속했다. 아내는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두세 개를 한꺼번에 해냈다. 봄꽃 같은 시절을 지나던 딸을 생계 전선에 잠시라도 출전하게 두었던 게 마음에 걸렸던지 장인은 아내에게 유독 애틋했다. 여의도와 마포의 술집을 하나씩 방문하던 시절에도, 첫날밤 호텔 앞 백반 집에 모였던 그날도 둘 사이에 쌓인 부녀의 정은 내게 요즘 흔한 표현처럼 넘사벽이었다.

(사진=SBS 방송 캡쳐)

SBS 드라마 ‘초인가족’의 만년 과장 나천일 씨는 퇴근길에 청천벽력 같은 장면을 목격한다. 금쪽 같이 여기며 영원히 품고 살 줄 알았던 딸 익희가 웬 놈과 함께 집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녀석이 익희에게 머리핀을 꽂아주며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한다. 당장 달려가 이단옆차기라도 날리고 싶지만 천일 씨는 중학생 딸에게 찾아온 사랑을 인정해주는 쿨한 아빠 노선을 택한다. 남자친구라는 녀석을 집으로 초대한 것.

초대까진 좋았지만 딸의 남자친구를 대해야 하는 상황은 천일도 처음 경험하는 일. 서툴고 어설프기 짝이 없다. 녀석을 붙들고 혈액형부터 별자리까지 시시콜콜하게 묻지를 않나, 남자친구와 자기 방에서 놀겠다는 딸의 말을 듣고 미리 방문을 떼어놓기까지 한다. 결국 방문을 다시 달아주고는 방에 들어간 딸과 남자친구가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 대화를 엿듣기 위해 문 앞을 서성거린다.

딸 익희에 대한 천일 씨의 사랑은 매번 이렇게 실수투성이였다. 첫 생리를 축하해준다며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족을 초대해놓고는 익희가 창피해하는 것도 모른 채 ‘생리 축하합니다!’라는 노래를 불러주고, 딸과 대화하기 위해 부하직원의 조카와 친구들을 불러 신조어 공부에 몰두하기도 한다. 딸의 관심을 끌려고 랩을 연습해 불러주기도 하지만 반응은 영 신통치 않다.

어쩌면 천일의 가장 큰 소망은 만년과장을 떼고 승진하는 것도, 대출금을 털고 내 집 마련을 하는 것도 아닐지 모른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그런 40대 아재일지라도 딸에게 만큼은 가장 강력한 초인이 되는 것, 그게 천일의 진짜 소망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슈퍼 영웅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이 드라마의 제목이 왜 ‘초인가족’인지 이해가 된다.

나의 장인도 딸에게만큼은 초인이길 바랐다. 어려워진 회사 경영 따위 단번에 물리치고 딸에게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 했다. 딸에게 아버지는 이미 그 존재만으로도 초인이었으나, 그의 마음은 달랐을 것이다. 우리가 결혼한 직후 장인은 그해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매년 어김없이 봄이 오면 아빠가 다시는 봄꽃을 보지 못하는 곳으로 갔다며 아파한다. 익희도 언젠가 천일의 품을 떠나고, 천일도 언젠가 익희에게서 떠나겠지만 천일은 익희에게 영원한 초인일 것이다. 아내에게 나의 장인이 그러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