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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하 칼럼] 영화 속 역사 그리고 돈 이야기
입력 2017-08-04 10:51    수정 2017-08-04 14:32

‘군함도’와 ‘덩케르크’의 공통점과 차이점

▲군함도 스틸 이미지

역사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모태다. 문화는 그 모태 위에서 새 역사를 창조한다. 현대 문화 상품의 선봉에 선 영화는 역사를 소재로 관객을 유도하고, 관객은 그 역사적 담론을 평가해 흥행을 심판한다. 영화 속 역사는 사실과 가깝거나 멀 뿐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창작자의 역량에 따라 때론 사실보다 더 진실로 다가간다. 먼 옛날의 역사는 편안하지만, 지금도 살아숨쉬는 가까운 역사는 불편하다. 요즘, 그 불편한 역사들이 영화에 점점 많이 등장하니 반갑다. 역사가의 고증도, 예술가의 비평도 아닌 경영학도의 영화 속 역사, 그리고 돈 이야기.

영화 ‘군함도’와 ‘덩케르크’는 공통점이 많다. 두 영화 모두 특정 지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 그리고 그 곳에서 일어난 전쟁과 갈등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두 영화의 제목은 모두 특정 지역을 부르는 호칭, 즉 지명(地名)이다.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18킬로미터 떨어진 하시마(端島)섬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 미쯔비시 그룹이 탄광사업을 위해 섬을 개발하면서 일본 군함의 모습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르는 비공식적 호칭이다.

‘덩케르크’는 우리가 흔히 ‘됭케르크로 많이 표기해 왔던 프랑스 대륙이 도버해협과 맞닿은 지역의 공식 지명이다.두 영화의 장르도 비슷하다. ‘군함도’의 장르는 액션, 드라마, 시대극이며 ‘덩케르크’도 액션, 드라마, 스릴러로 구분된다. 워낙 알려진 두 영화라 역사적 배경은 간단히. ‘군함도’는 1943-45년 일제 강점기 군함도 탄광사업에 강제 징용된 500-800여명의 조선인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이야기를 다뤘다. 국무총리실 산하 연구기관에서도 이곳에서 질병, 영양실조, 익사 등으로 숨진 조선인만 20%에 달하는 122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덩케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 초반부인 1940년5월26일부터 6월4일까지 덩케르크 지역에 고립됐던 영국군을 포함한 연합군의 사상 최대규모 탈출작전을 그린 영화다. 당시에 33만8226명의 연합군이 독일군의 공습 위협 속에서 탈출했고, 이 군인들이 4년 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면서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점에서 영국과 미국인들에게 역사적 의미가 큰 사건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이 두 영화의 역사관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군함도는 역사왜곡이라는 비난까지 받고 있지만, ‘덩케르크’는 다른 나라의 역사기 때문인지 논란에서 비켜나 작품성에 대한 호평을 받고 있다. 역사적 논란에 앞서 전제해야 할 점은 두 영화 모두 액션 드라마 장르의 상업영화라는 점이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조합하여 만든 팩션(Faction) 장르를 표방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모티브로 삼았으나 어디까지나 허구를 창작한 작품이다.

창작물인 영화가 역사를 왜곡한다는 주장은 원천적으로 모순적이다. 엄밀히 얘기하면 역사왜곡은 역사에 대한 정부의 공식 기록이나 입장, 교과서 등이 그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과거사 문제처럼 국가가 공인하는 역사가 사실 또는 진실을 반영하지 못할 경우 왜곡이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극 영화가 언제부터 역사를 정확하게 반영해 왔던가. 영화 암살에서 김구와 김원봉이 친했다는, 밀정의 황옥이 애국자였다는 설정이 사실과 다른 허구라는 한 역사학자의 지적처럼, 극 영화 속 역사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건 위험한 일이다. 물론 역사를 바라보는 창작자의 시각이 관객들의 비난을 사거나 외면을 당할 수는 있겠지만, 영화는 역사적 표현을 할 뿐, 영화가 있었던 역사 자체를 왜곡할 수는 없다. 역사적 사건을 기초로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들은 시대적 배경과 역사를 탐구해 인물과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개연성 있게 표현하는 사람일 뿐, 역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군함도’와 ‘덩케르크’의 공통점 중 눈에 띄는 것은 두 영화 모두 기존의 선악구도에서 탈피했다는 점이다. 선과 악이 만나 한판 승부를 벌이고, 그 결과에 따라 희비가 결정되는 구조가 아니다. 두 영화가 악을 표현하는 방식은 정반대로 대조적이다. 한쪽은 악의 진영을 다각도로 넓혔고, 다른 한쪽은 악의 진영을 스크린 밖 상상의 영역에 뒀다.

‘군함도’의 경우 선과 악의 여러가지 캐릭터들이 공존한다. 억울하고, 외롭고, 강하고, 정의로운 주인공들이 있는 반면, 비인간적 인격을 가진 점령자, 반역자, 부역자, 어리석은 추종자들도 등장한다. 개봉 전부터 영화계 사람들 사이에서 나왔던 지적은 '안타고니스트' 즉 적대적인 대상이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창작자의 의도를 넘겨짚는 것은 주제넘고 위험한 일이지만, 필자 역시 ‘군함도’를 보면서 창작자가 선악관계에서 조선인 내부의 갈등을 강조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일본만을 절대적인 악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조선사람을 악으로 강조한 것 아니냐는 불만은, 심지어 ‘친일’영화라는 비난으로까지 번졌다.

반면 ‘덩케르크’에는 극 중 인물들을 공격하는 독일군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독일군의 전투기와 포탄, 총알의 위력과 사운드가 안타고니스트의 역할을 한다. 군함도처럼 선악의 캐릭터가 병렬된 영화와는 달리 덩케르크의 악은 새롭고 오히려 더 두렵다.

그렇다고 ‘군함도’와 ‘덩케르크’의 작품성을 이 같은 악의 표현방식으로 재단할 수 있을까. 감정선의 과잉과 절제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표현의 디테일과 촬영의 기술, 배우들의 열연은 군함도가 더 강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물며 역사왜곡이라는 잣대로 두 영화의 우열을 가리거나 작품성을 따지는 의견에는 동조하기 어렵다.

물론 ‘암살’과 ‘밀정’에도 반역자와 부역자가 등장하지만, 두 영화보다 역사왜곡 논란이 심각한 걸 보면 이같은 창작자의 의도가 대다수 관객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한 한계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 살아 숨쉬는 내부적 ‘남남갈등’을 다룬 영화는 늘 불편한 반응을 초래했다. 해방과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 중 색깔이 불분명한 영화는 외면 받기 십상이었다. 조선시대 시대극이 비싼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근현대극보다 현저히 많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하물며 반일의 모티브 아래 다양한 남남갈등을 버무린 군함도의 용기와 배짱은 일종의 ‘금기’를 건드린 모양새다.

험악한 입소문에도 관객들의 발길이 계속되는 걸 보면, ‘군함도’를 향한 논란은 역사적 표현의 불편함과 대기업 스크린 독과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상반기 내내 할리우드 영화들이 만끽하던 스크린 독과점이지만, 연중 가장 성수기에 영화계 최대기업 CJ가 ‘건곤일척’의 기운으로 가장 많은 스크린을 몰아주자 모든 화살이 군함도로 쏠리는 모습이다.

어쨌거나 중국 관영언론의 찬사처럼,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이라는 술수로 열심히 역사를 땜질하고 있는 일본에 경각심을 울린 창작자들의 용기와 뚝심만큼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상업적, 사회적 감정과 역사적 감정을 떼어놓고 볼 수 있다면 논란의 한복판에 선 감독과 배우, 모든 참여자들의 노력이 조금은 더 잘 보이지 않을까.

얼마전 까지만 해도 빨갱이 취급을 받던 비운의 항일투사, 남북협상 이후 남한에서 북한으로 진로를 바꾼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조승우, 이병헌이라는 한국의 대표 배우들이 연기할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한국영화의 리더급 창작자들은 이미 이분법적 역사의식에서 벗어나 자본을 등에 업고 용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부디 다양한 영화에서 이런 시도들이 계속되길.

김동하 한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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