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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모 칼럼] ‘죽어도 좋아’, 꼴찌라도 좋아!
입력 2018-11-23 16:46    수정 2018-11-23 17:16

지난 21일 SBS ‘황후의 품격’과 MBC ‘붉은 달 푸른 해’가 나란히 출격하면서 시청률 1, 2위에 오르고 KBS2 ‘죽어도 좋아’가 꼴찌를 ‘고수’하는 수목드라마 구도가 형성됐다. 오는 28일 시작되는 tvN 송혜교, 박보검 주연의 ‘남자친구’까지 끼어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도 좋아’는 이른바 마니아층을 형성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초인가족’이 시청률을 떠나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과 유사한. 아무래도 ‘초인가족’처럼 직장 내 분위기를 판타지를 결합해 현실적(?)으로 그려낸 게 비결일 것이다.

우리 드라마는 오랫동안 재벌가의 얘기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지만 언제부턴가 소시민들로 주인공이 바뀌는 추세다. 사회부 기자들의 실생활을 제대로 묘사한 거의 최초의 드라마라 할 ‘피노키오’(2014)를 기점으로 그런 흐름이다. 비현실적인 영화일수록 관객들을 속이려는 노력은 더욱 가상하다.

그런 면에서 ‘죽어도 좋아’는 그런 속임수(타임 루프라는 판타지)와 현실감각(피부에 와닿는 직장의 현실)을 때론 코믹하게, 때론 진지하게 그림으로써 IMF 구제금융 이후 정규직이 현저하게 사라지고, 해고가 눈에 띄게 잦아진 치열한 생존경쟁 속 정글의 법칙을 살 떨리게 그려낸 게 주효했다.

무대는 굴지의 식품기업 MW푸드의 자회사 MW치킨. 자신보다 월등한 형 강명한이 갑자기 떠남으로써 사장이 된 인한(인교진)과 딱 1년만 평사원으로 근무하면 어떤 소원도 들어주겠다는 MW푸드 창립자인 할아버지의 제안에 입사한 명한의 아들인 개발팀 대리 준호(공명)가 후계자 다툼 중이다.

그들 사이에 걸친 이가 나 회장의 눈에 들어 25년째 장기근속 중인 나철수(이병준) 상무. 주인공은 대리 이루다(백진희)와 팀장 백진상(강지환)이다. 진상은 명문대 입학 후 4년간 내리 장학금을 받는 등 뭐든지 1등을 고수해온 수재이자 원칙주의자. 운동장에 쓰레기를 버린 교장을 고발했을 정도다.

‘세상만사를 제대로 보라’고 지어준 이름이지만 사실은 시쳇말로 진상을 떠는 상사 노릇을 하고 있다. 그래서 직원 중 누구라도 그에게 저주를 퍼붓거나 욕을 하면 죽고, 그러면 같이 타임 루프에 갇힌 루다가 살려내는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중이다. 이 생활에서 루다가 깨닫는 건 내일의 소중함이다.

대다수의 샐러리맨들은 다를 바 없는 매일을 살고 있지만 그 매일이 똑같지 않기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내일도, 모레도, 오늘과 다를 바 없을 것을 알고 있지만 조금은, 아니 점점 더 나아지리라는 염원 속에 힘든 하루를 견디는 게 일상성이다. 그건 희망이라는 오리무중이지만 긍정적 정상성(기분)이다.

루다가 ‘진상짓’만 골라 하는 진상을 매일같이 되살리는 이유는 진상 개인만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를 위해서다. MW치킨이라는 공간성의 세계에서 같은 시간성을 사는 사원들과 그들에게서 내일의 희망을 기대하는 가족들을 위한 봉사다. 내일을 바꾸자는 가상한 노력인 것이다.

수요일은 영화 개봉일. 오는 28일에는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된다. 1997년 말 외환위기로 국가가 부도날 위기에서 정부가 IMF 구제금융으로 경제권을 국제통화기금(사실상 미국)에 넘겨준 국치의 사건을 그린 영화다. 그 조치로 인해 대규모 해고와 비정규직 양산이란 사태가 지금도 이어진다.

그런 면에서 ‘죽어도 좋아’의 상황과 에피소드는 ‘국가부도의 날’이 낳은 결과고 여파의 현재진행형이다. 한때 ‘평생직장’이란 말이 유행됐었다. 중소기업일지라도 경영구조가 탄탄하다면 그런 회사에 입사만 하면 정년퇴임 때까지 나와 내 가족을 지켜준다는 믿음을 갖고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다녔던.

박유덕(김민재) 과장은 지극히 평범한 가장이다. 아침에 밝게 배웅하는 아이들에겐 최고의 영웅이기 때문에 회사생활이 힘들어도 치사하지만 비열하게 버틴다. 최민주 대리(류현경)는 대학 때의 연인과의 속도위반으로 어린 나이에 엄마가 돼 입사했다. 아이를 봐주는 친정엄마 눈치까지 봐야 한다.

이 모든 샐러리맨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자고, 어떤 시청자에겐 거울일 수도 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하는 그들은 회사의 하부조직, 즉 꼴찌다. 공교롭게도 ‘국가부도의 날’과 겹쳐지면서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국민들이 왜 꼴찌가 됐는지, 절로 한숨짓게 만들기에 의미가 각별하다.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위주로 진행되다 말미에 현재로 점프한다. 국민의 금 모으기 운동으로 부도는 막았지만 비정규직의 양산과 취업난으로 젊은이는 애가 끓고, 가장은 허덕인다. 부자는 여전히 ‘이대로’를 외치고. ‘죽어도 좋아’는 죽는 게 좋을 리 없겠지만 세상이 그렇다는 반어법이다.

어제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오늘은 한결 나아질 것이고, 내일의 설계도는 조금 더 튼실해질 수 있다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죽음을 향하게 하지만 부자에게는 더 큰 부를 쌓게 하고, 빈자에게는 ‘혹시나’라는 실오라기 잡는 심정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역시나’일 것을 잘 아는 절망일 수밖에 없다는 게 다르다.

그 점에서 ‘욕하면서 보는 막장’ 일색이던 기존 드라마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톰 크루즈의 ‘엣지 오브 투모로우’부터 ‘7번째 내가 죽던 날’ ‘어벤져스’까지 살짝 엿보이긴 하지만 소재야 특허가 아니니까.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착하게 살라는 메시지야말로 생철학이다.

메를로-퐁티는 현재를 스스로 현재가 아닌 것으로 탈출해가는 ‘탈-현재화’로 봤다. 시간은 자기를 자기로부터 분리하는 자기초월의 운동이란 것. 이 자기차이화에서 시간은 존재자와 합일해 존재론적 지위를 얻는 의식의 존재방식이 된다. 바로 루다와 진상의 타임 루프가 바꾸고자 하는 내일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꼴찌와 일등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