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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인터뷰] 장수희 작가, 캔버스 위에 쌓은 17년 고향 향한 그리움
입력 2021-08-30 13:00   

▲장수희 작가

코로나19로 인해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된 지 1년 6개월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 호주 브리즈번에서 17년째 살고 있는 서양화가 장수희 작가는 여섯 번째 개인전을 개최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에게 코로나19는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장수희 작가는 오는 9월 1일부터 6일까지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제6회 '장수희 개인전'을 연다. '팬데믹' 시국에 호주에 사는 화가가 개인전을 위해 한국에 온 이유가 뭘까. 장 작가는 "향수병을 치유 받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가 살고 있는 브리즈번은 정말 아름다운 도시에요.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와 푸른 하늘이 사계절 내내 펼쳐지지만 사계절 변화가 없죠. 그런 호주에서 17번의 겨울을 여름에 맞았어요. 언제부터인가 향수병이 시작되더군요."

장 작가는 그림을 중학생 때부터 배웠고, 대학에선 시각 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집안 사정으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고, 2005년 혼자 호주로 와서 결혼 후 브리즈번에 정착했다. 그러던 중 그는 동생을 잃는 슬픔을 겪게 됐고, 긴 타향살이가 불러온 외로움에 깊은 슬픔이 더해지면서 지독한 향수병으로 이어졌다.

물론 장 작가는 향수병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던 2016년 늦가을, 집 앞 호수공원에 간 장 작가는 바람에 의해 나무껍질이 전부 벗겨진 유칼립투스를 보게 됐다. 땅에 떨어진 나무껍질들은 장 작가에게 충격과 깨달음을 선사했다.

"당시 동생을 잃고 혼자 호주라는 낯선 땅에 온전히 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을 때였어요. 그런데 땅에 떨어진 나무껍질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더라고요. 바닥에 떨어진 나무껍질들은 거름이나 쓰레기 신세가 되잖아요. 나도 이러다 가치 없는 존재가 될 것만 같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어요. 그러긴 싫었거든요. 그때부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기 시작했어요."

이후 장 작가는 나무껍질을 모아 캔버스에 부치는 작업을 시작했다. 유칼립투스 나무껍질은 장 작가의 첫 작품 '눈이 녹아(stushily)' 속 사슴으로 재탄생됐다. 장 작가는 "나무껍질이 멋진 작품으로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라며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삶의 의미가 생겼다"라고 밝혔다. 그때부터 장 작가의 향수병도 차츰 가라앉았고, 동생에 대한 그리움도 조금씩 메워졌다. 작품 활동으로 위로와 평화를 찾게 된 것이다.

▲장수희 개인전 포스터

이번 전시회의 제목도 '향수'다. 장 작가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여기서도 느껴진다. 이번 전시회에는 29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가장 큰 120호가 1점(염원), 100호가 2점이다. 나머지는 10호에서 12호 작품이다. 29점 모두 레진으로 작업한 것들이다.

합성수지를 주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장 작가는 고글과 공업용 마스크가 꼭 필요하다. 오랫동안 밀폐된 공간에서 작업하면 건강에 안 좋은데 장 작가는 에폭시 작업을 3년째 하고 있었다. 주위에선 건강상의 이유로 레진 사용을 그만둘 것을 권하지만 장 작가는 레진이 움직이는 과정을 즐기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아마 세계에서 레진을 이용해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유일한 작가일 것"이라고 소개하며 웃음을 지었다.

장 작가의 작품은 모든 풍경에 눈이 내리고 있다. 장 작가는 "호주 브리즈번에 오고 17년 동안 한 번도 눈을 볼 수 없었다"라며 "눈은 고국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캔버스 위에 눈을 내리게 하는 순간만큼은 향수병이 사라진다고 덧붙였다.

"제 그림의 시작은 지독한 외로움과 그리움이라는 '점(點)'에서 시작합니다. 그 점 하나하나에 그리움을 담아 선이 됐고, 세상이 됐고, 제가 머물고 싶은 풍경 속 이야기가 됐어요. 전 그림 속에서 점들로 한 송이 차가운 눈을 만들어 겨울이라는 계절을 그리고, 그 속에서 전 눈을 맞으며 고향길을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을 감상자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마음으로 봤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그림을 봐준다면 제 그림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장 작가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 준 중학생 시절 미술 선생님 정용일 작가를 존경한다고 했다. 그는 정 작가에게 미술에 대해 고민할 시간에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소재,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면 된다고 가르쳤다. 덕분에 정 작가에게 그림은 곧 삶 자체가 됐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됐다.

"그림은 변치 않는 친구, 쉼터 같은 공간, 치유의 시간입니다. 그림 작업할 때가 가장 장수희다운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번 전시회를 마치면 장 작가는 가족들과 호주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호주에 살았지만 17년 만에 처음 떠나는 여행이다. 물론 작품 활동을 위한 여행이기도 하다.

"2022년 상반기 '인터뷰(INTERVIEW)'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계획하고 있어요. 가족들과 호주 여행하며 만나게 되는 풍경들이 다음 전시회의 주인공들입니다. 여행하며 만난 풍경들을 인터뷰하고, 캔버스 위에 수필처럼 그려낼 생각이에요. 호주의 멋진 풍경들이 캔버스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탄생될 것입니다. 지금 같은 코로나 시국에 힐링을 선물할 수 있는 호주의 풍경들을 그려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