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안중근을 영웅이라 부른다. 하지만 영웅이란 이름은 때로 한 사람의 고뇌와 두려움, 인간적인 면모를 잊게 한다.
영화 '하얼빈'(제공/배급: CJ ENM)은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주인공이다. 안중근(현빈)을 중심으로 뭉친 동지들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린다. '하얼빈'이 앞서 안중근 의사를 다뤘던 작품들과 다른 점은 안중근의 영웅적 면모를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안중근의 인간적인 고뇌를 무게 있게 다룬다. 여기에 독립군 내부의 갈등과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 인물들의 신념이 교차하며 긴장감이 넘치는 드라마가 펼쳐진다.
'하얼빈'의 시작은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는 안중근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서릿발이 날리는 두만강, 안중근의 처절한 발걸음은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뒀지만, 자신의 신념 혹은 잘못된 선택에 동지들을 모두 잃은 안중근의 모습이다. 일련의 과정으로 안중근의 리더십은 흔들리고, 안중근 또한 인간적인 두려움에 빠지지만, 그는 왼손 약지를 잘라내며 독립을 향한 의지를 다진다.
1년 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선 안중근과 우덕순(박정민),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 최재형(유재명), 이창섭(이동욱) 등이 하얼빈으로 향하는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 처단 계획을 세운다. 익히 잘 알려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이고, 이 의거의 결과 또한 모든 한국인이 알고 있다. 그래서 '하얼빈'은 인물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관객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한다.
현빈이 연기한 안중근은 이 영화의 중심축이다. 영웅 안중근의 얼굴은 현빈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 그는 시대의 영웅으로서 강인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청년 안중근이 경험한 갈등과 두려움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거사를 치르기 위해 거침없이 전진하는 것처럼 보여도, 안중근이 감당해야 했던 책임의 무게와 결단의 고독이 현빈의 눈빛으로 표현됐다.
안중근 곁을 지킨 동지들의 앙상블도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박정민과 조우진이 각각 연기한 우덕순과 김상현은 목적은 같지만, 안중근과는 조금씩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자신만의 개성으로 극에 현실감을 더한다. 전여빈은 공부인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여성 독립운동가의 헌신과 강인함을 그려내며 인상적인 존재감을 남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허구의 인물 이창섭 역의 이동욱은 안중근의 리더십에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며, 극 초반의 균열을 일으킨다. 이후에는 안중근을 집요하게 쫓는 일본군 모리 다쓰오(박훈)와 대립하며 독립군의 동료애를 표현하고, 안중근의 고결함을 돋보이게 한다.
우민호 감독은 첩보물이라는 장르를 추가해 영화의 서스펜스를 높였다. 독립이라는 대의를 추구하지만, 각자 다른 가치관을 지닌 독립군 사이 '밀정'이 있다는 설정을 추가한 것이다.
여기에 압도적인 비주얼과 음악은 '하얼빈'의 매력을 높인다. 한국과 몽골, 라트비아에서의 로케이션 촬영은 광활한 설원, 삭막한 사막 등 살풍경을 담아내며 시대적 고독과 독립군들의 결의를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완성된 음악은 웅장하면서도 감정의 깊이를 더한다.
영화의 엄중한 분위기와 정적인 연출은 일부 관객에게 호불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정적인 전개가 1909년의 무게를 강조하며, 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진중하게 전달하기도 한다.
'하얼빈'은 안중근의 희생과 신념을 담은 드라마이자, 우리에게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영화다. 현빈의 묵직한 열연, 동지들의 열정, 아름답고도 처연한 비주얼은 관객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을 울림을 선사한다. 1909년의 총성은 멈췄지만, 그 울림은 2024년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오는 24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 시간 114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