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일 방송되는 EBS1 '건축탐구 집'에서는 자신의 삶과 생각이 담긴 ‘철학의 왕국’을 만나본다.
◆설계도 없이 그림으로 지은 집
충남 당진에서 평생을 농부로 산 아버지의 남다른 심미안을 꼭 빼닮았다는 이상일 씨. 누나가 셋이라 화관을 만들어 동네 여자아이들 머리에 씌워주고, 공기며 고무줄놀이를 즐기던 이상일 씨에게 ‘남자’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김 씨는 신선한 충격이었단다. 그 길로 복장학원에 등록해 옷 만드는 법을 배우고 졸업 직후 고급 양장점에 스카우트되었다.
하지만 1980년 제대 뒤 그의 삶은 바뀌었다. 패션지 「보그」를 읽다 ‘남자’ 미용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프랑스 국립미용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한 뒤, 흔히 보이던 OO미장원이 아닌 ‘헤어뉴스’를 개업했다는 이상일 씨. 헤어 디자이너라는 명칭과 유니폼을 처음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후 헤어 디자이너로 큰 성공을 거둔 이상일 씨는 1996년 사둔 이천의 산자락을 떠올리고,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

공사를 진행하면서 설계도나 도면 없이 그때그때 바닥이나 판자에 그림을 그려 가며 집을 지었다. 정해진 설계도가 없었기 때문에 능선을 따라 바위와 나무, 심지어는 땅의 형질도 그대로 살릴 수 있었다는데. 공사 중에 바위가 많이 나와도 계단 폭을 좁혀 바위를 살리고, 땅이 평평하지 않아도 그대로 경사를 살려서 지었다.

전남 함평 ‘부처의 자손들이 산다’는 손불면에서 태어난 철학자 최진석 교수. 아홉 살 때 방 두 칸에 부엌 하나 광 하나 딸린 작은 집으로 이사해 살았다. 부엌과 방 사이에 구멍을 뚫어 호롱불 하나로 두 공간을 밝히던 집. 부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집에서 사셨다.
학교 선생님이었지만 변변한 집 한 채 남겨주지 못한 것을 속상해하셨던 아버지. 그 점이 마음에 걸렸던 최진석 교수는 온 가족이 평생 살았던 집터에 새집을 지었다. 옛집의 기억을 간직하면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집이라는데.

최진석 교수의 ‘철학의 왕국’을 이룬 세 채의 집은 건축가가 모두 다르다. 그 이유는 집을 짓는 과정에서 건축이 상당히 수준 높은 쾌락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머릿속에만 있던 개념이 실체가 있는 구조물로 만들어지는 쾌감은 책 다섯 권을 써낸 기분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