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웃겨도 되는 거냐고 감독님께 물어봤어요."
이병헌은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다. 그런 그가 '월클 감독' 박찬욱 감독에게 웃겨도 되는지를 물었단다. 웃기겠다는 욕심이 있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박찬욱 감독의 의도가 궁금해서였다.
24일 개봉한 영화 '어쩔수가없다'(제공/배급: CJ ENM)는 갑작스런 해고로 벼랑 끝에 몰린 25년 경력의 제지회사 직원 만수(이병헌)가 가족과 집을 지키기 위해 점점 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이다. 영화는 재취업 과정에서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해나가는 만수의 블랙코미디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이날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웃기려고 연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라고 강조했다.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는 코미디가 아닌, 상황 자체의 아이러니를 선호한다면서 '어쩔수가없다' 역시 그런 영화라고 밝혔다.
'어쩔수가없다'는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25년 만에 이병헌과 박찬욱 감독이 다시 만난 작품이다. 대배우와 거장의 만남은 해외에서도 주목했다. '어쩔수가없다'는 국내 개봉 전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며 국제적 주목을 받았고,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는 국제관객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이병헌은 박 감독과의 재회에 대해 "기쁘면서도 책임감이 커졌다"라고 말했다.
"박찬욱 감독님은 늘 온화하지만 촬영 현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건 배우에게 끝까지 요구하는 분이에요. 그런데 이번엔 제 아이디어를 많이 택해주시더라고요. 기분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겁도 났어요. 자칫 영화가 잘못되면 그 책임을 고스란히 나한테 지우려고 하시는 건 아닌가 해서요. 하하."

이병헌이 연기한 만수는 불안과 처절함 속에서 우스꽝스럽게 흔들리는 인물이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로 만수가 압박면접을 보는 순간을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았다.
"만수는 겉으로는 여유롭지만 내면은 불안으로 가득 찬 인물입니다. 불쌍하면서도 우스운 만수의 모습이 그 장면 안에 다 담겨있어요. 코미디는 상황이 웃기면 언제든 환영이지만, 배우가 웃기려고 달려들면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많아요. 억지로 웃음을 만들어내려는 건 배우가 가장 경계할 부분이에요. 그런 점에서 만수의 면접은 상황이 많은 것을 설명해주고, 여러 감정을 느끼게 해줘서 좋아해요."
이병헌은 만수의 아이러니를 짚으면서,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자신의 해석을 들려줬다. 외형은 블랙코미디지만, 본질적으로 '어쩔수가없다'는 비극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만수의 첫 대사는 '다 이루었다'예요. 그런데 영화가 다 끝날 때쯤엔, 실제로 말하는 건 아니지만 만수는 '다 잃었다'라고 했을 거예요. 경쟁자를 죽였지만 결국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영혼이 망가져 버린 뒤였으니까요."
최근 베니스 영화제 참석 경험에 대해서도 특별한 감회를 표했다. 특히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을 통해 K-콘텐츠를 사랑하는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체감한 바 있지만, 더 강렬한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염혜란 배우는 '폭싹 속았수다', 손예진 배우는 '사랑의 불시착' 등 배우들이 각자 전 세계 팬들을 얻은 작품들이 있었어요. 한국 콘텐츠가 이렇게까지 어마어마해졌구나 싶어 정말 놀랐습니다. 타인의 취향만 노린 콘텐츠만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처럼 우리가 잘하는 걸 꾸준히 보여주는 게 K-콘텐츠가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34년 차 배우 이병헌도 연기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도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배우 이병헌'이 될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항상 답은 같았어요. 내가 재미있다고 느낀 이야기를 진심으로 연기하는 것. 그것밖에 없더라고요. 어쩔 수가 없어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