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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준필의 시선]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박예니, 간극을 연기하는 배우
입력 2026-05-20 17:40   

▲박예니(사진출처=에일리언컴퍼니)

결혼 후 생활 습관의 차이로 남편과 충돌하는 아내, 아이가 생긴 뒤 육아의 고단함을 온몸으로 견디는 엄마. 갈등과 고단함 뒤에는 부딪히고 맞춰가며 단단해지는 가족의 얼굴이 있었다. 2분 안팎의 KCC 스위첸 광고 '문명의 충돌' 시리즈를 통해 배우 박예니는 눈도장을 찍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박예니는 지난해 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부터 '백번의 추억'까지 6개의 작품에 출연하며 '열일' 행보를 이어갔다. 올해는 넷플릭스 '사냥개들2'와 JTBC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로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다. 그런데 박예니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보인다. 그가 맡은 인물에는 늘 '이면'이 존재한다.

박예니는 최근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영화계 유명 모임 '8인회'의 멤버이자 영화사 최필름 소속 기획PD 최효진으로 열연을 펼치고 있다. 최효진은 황동만(구교환 분)을 향한 노골적인 멸시와 거침없는 뒷담화로 극 초반부터 불편한 공기를 조성하고 회사 후배 변은아(고윤정 분)와는 사사건건 충돌하며 날 선 대립 구도를 이끌어간다. 얼핏 보면 전형적인 밉상 선배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박예니(사진=JTBC 방송화면 캡처)

그런데 극이 진행될수록 최효진은 예상과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최동현(최원영 분) 대표, 마재영(김종훈 분)과의 식사 자리에서 능숙하게 분위기를 띄우고 '8인회' 멤버 고혜진(강말금 분)에게는 상황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는 최효진의 모습은 타인을 무가치하게 바라보던 그 역시 관계 속에서 줄타기하는 평범한 직장인임을 드러낸다.

특히 변은아를 향해 날을 세울 때의 냉소, 상대의 반박을 예상하지 못했을 때의 당혹스러운 표정, 윗사람 앞에서 순식간에 바뀌는 얼굴까지 박예니는 말보다 표정과 반응으로 최효진의 두 얼굴을 그려냈다.

최효진의 두 얼굴은 박예니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지난해 박예니가 쌓아올린 필모그래피에선 이러한 '이면'을 지닌 캐릭터들이 또 있기 때문이다. JTBC '백번의 추억'의 최정분은 걸쭉한 욕을 기가 막히게 구사하는 버스 안내양이지만, 실은 부딪힘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였다. 입담은 거칠어도 기숙방 식구들을 살뜰히 챙기고 받는 월급을 고향으로 보내는 진짜 짠순이였다. 겉으로 강단 있어 보이지만 속은 여린 인물이었다.

▲‘백번의 추억’ 박예니(사진=JTBC)

넷플릭스 시리즈 '사냥개들'의 강태영은 또 다르다. 사이버 범죄 수사과 팀장 출신의 냉철한 브레인 강태영은 시즌1에서 두 다리를 잃었고, 시즌2에서는 휠체어 신세가 된 채 재활 중인 인물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다치게 했던 일에 연루된 김건우(우도환 분)와 홍우진(이상이 분)을 원망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대인배의 면모를 보였다. 강태영은 상처 입었지만 내면의 강인함이 있는 인물이었다.

최효진, 최정분, 강태영 등 세 캐릭터 모두 첫인상과 실제 사이에 간극이 있다. 박예니는 매번 그 간극을 연기의 재료로 삼아왔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는 밉상이라는 외피 안에 현실을 살아가는 직장인의 얼굴을 함께 넣는 것, 그것이 박예니가 최효진을 소화하는 방식이었다.

▲박예니(사진출처=에일리언컴퍼니)

단순하게 소비되지 않는 캐릭터들을 선택했기에 박예니가 연기한 인물들은 작품이 끝나도 어딘가에 남아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종영 이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효진이 어떤 얼굴로 기억될지, 그리고 박예니가 다음에 또 어떤 이면을 가진 인물로 시청자들과 만날지 궁금하지 않은가.